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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꿀 때마다, 누군가 구해달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대학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나, 구원을 바라는 목소리에 응답하는 힐다.

과거에 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에니오.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못해서 진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카모.

이 세계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가혹하지만.

춥고 외롭고 슬프기만 하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서로에게 연결되고 싶으니까.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하는 미래를 믿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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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방영 | 13화

걸즈 밴드 크라이

ガールズバンドクライ

※마기카로기아 3부작 캠페인 『이 끝나가는 세계에서』의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직접적인 스포는 아니나, 플레이 예정이 있을 경우 열람에 주의해주세요. 


 

“이 앰프, 내부를 한 번 확인해보면 어떻겠습니까?” 

힐다가 불쑥 말했다. 한 라이브하우스 공연의 리허설에서였다.  

“엥? 갑자기?” 

한바탕 사운드 체크를 마친 카모가 드럼스틱을 들고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자, 힐다가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뭐 문제라도 있어?” 

“그런 건 아니지만… 철저하면 좋지 않나요!” 

아무 말 없이 베이스를 튜닝하던 에니오도 시선을 옮겨 힐다를 바라보았다. 이 앰프는 그들이 그럴듯한 이름 없이 처음 모였을 때부터 쓰던 장비로 지금까지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값싸게 마련한 마이크나 기타 스트랩 따위를 점검하는 거면 모를까, 사고 한 번 친 적 없는 덩치를 굳이 뜯어서 살펴본다는 건 시간 낭비로 느껴졌다. 

“…….”    

“아, 하하….”

서슬 퍼런 에니오의 시선에 힐다가 겸연쩍은 웃음을 흘렸다. 잠깐의 정적 후, 에니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점검해.” 

“에니오 님이 하라면 해야지!” 

허락이 떨어지자 카모가 팔짝팔짝 뛰어가더니 스태프들에게 공구 몇 가지를 빌렸다. 힐다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습니다, 에니오.” 

천만다행이라는 듯한 투였다. 큰일을 막아낸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이상한 안도감이 힐다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

에니오는 여전히 냉담한 눈으로 힐다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별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 밴드의 중요한 일은 대개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힐다가 제안하면, 에니오가 결정을 내리고, 카모가 수행한다. 힐다는 성실하고 의욕적인 성격이었지만 잡기에는 다소 서툴렀던지라 실질적인 행동은 주로 카모가 도맡았다. 열여덟 살인 카모는 뭐든지 배우는 속도가 빨라서, 우스갯소리로 잘 하는 사람을 찾아 잡아먹고 오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카모도 고맙습니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지요.”

“괜찮아, 괜찮아. 에니오 님하고 힐다 님은 쉬고 있어! 카모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짜잔하고 해낼 테니까!”  

“든든하네요.” 

힐다의 말에 카모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화답하다가, “빨리 끝내.” 하는 에니오의 핀잔을 받고 나서야 일을 시작했다. 어쨌든 솜씨 좋은 정비공을 잡아먹고 온 카모는 공구 몇 개를 받더니 호언장담했던 대로 손쉽게 앰프를 해체해냈다. 앰프를 점검하자고 제안하긴 했지만 정작 기계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던 힐다는 신기한 기색으로 그 광경을 기웃거렸다. 

“앗!” 

“무슨 일입니까, 카모?” 

“정말 문제가 있었어!” 

“무슨 문제.” 

카모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치자, 지금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던 에니오도 발걸음을 옮겨 앰프 쪽으로 다가왔다. 리허설을 앞둔 세 사람이 앰프 하나를 두고 옹기종기 모인 모습은 다소 뜬금없긴 했지만 카모는 제법 진지했다. 

“여기, 내가 가리키는 곳 좀 봐봐.”

카모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 두 사람의 시선이 집중됐다. 앰프 내부에는 입력 단자와 가느다란 전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문외한인 두 사람의 눈엔 뭐가 문제인지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두 밴드맨의 표정이 점점 아리송해지자 카모가 의욕적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음.” 

“흠.” 

그러나 안타깝게도 카모의 설명은 상당히 두서없고 난해했다. 두 사람은 설명의 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적당히 이해한 척을 하며 은밀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완벽하게 해설을 마쳤다고 생각한 카모가 지나치게 뿌듯해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여간, 요약하자면 “점검 안 하고 그대로 갔으면 무대에서 사고 날 뻔 했어!” 라는 거였다. 카모는 그대로 리허설을 했더라도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리허설에서 멀쩡해서 무방비로 본방에 들어갔는데, 막상 무대에서 앰프가 터져 버리면 음향도 엉망이 되고 최악의 경우엔 라이브하우스 전체 전력이 내려갔을 수도 있단다.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습니까!?” 

“그렇다니까! 힐다 님이 점검하자고 해놓고, 몰랐던 거야?” 

문제를 확인하고 나니 해결은 식은 죽 먹기였다. 우선 수리는 공연이 끝난 뒤로 미루기로 하고, 위험천만한 앰프는 라이브하우스에 구비된 예비용 앰프로 빠르게 교체되었다. 정작 점검을 제안한 힐다는 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미래’ 이야기에 화들짝 놀란 것 같았다. 카모의 호들갑에 힐다는 조금 멋쩍은 얼굴로 뺨을 긁으며 말했다. 

“그게…….” 

“그게?” 

“어젯밤 꿈에서, 저 앰프가 말썽을 일으켜서요.” 

“꿈?” 

“예에.” 

“꿈 때문에 점검하자고 한 거라고?!” 

“하하…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단 건 알지만요!” 

그래도 신경이 쓰여서, 라고 덧붙이며 힐다가 에니오를 흘끔 바라보았다. 에니오는 문제가 해결됐으니 이제 신경쓸 것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간 뒤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앰프의 문제가 확실시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힐다를 향해 있었다. 힐다로서는 한 번 더 겸연쩍은 기분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반응이 없었다. 

둘 사이의 석연치 않은 기류는 카모가 금방 덮어주었다. 공연 시작 전에 에너지를 충전해야 한다며 편의점 빵을 세 개나 흡입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애매했던 분위기도 금방 수복되기 마련이다. 앰프 교체 후 리허설은 별 문제 없이 끝났고, 본 공연 호응도 기대 이상이었다. 흥분한 카모가 림샷을 하다가 스틱을 부러뜨린 것만 빼면 모든 게 다 괜찮았다. 소규모 공연에서 이런 해프닝은 오히려 분위기를 더 뜨겁게 달궈주기까지 했다. 물론 힐다가 재빠르게 새 스틱을 건네준 덕분이었지만. 

공연이 끝난 뒤, 수리할 앰프를 트렁크 안에 실으며 힐다는 무심코 앰프의 어떤 지점을 짚었다. 그리고 잠깐 무언가 생각했다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을 뗐다. 어젯밤 꿈에서는 분명…….


 

* * *


 

눈꺼풀을 두드리는 열기에 눈을 뜨자, 세상이 불타고 있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귀가 먹먹해졌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힐다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무시무시한 열기는 하늘로부터 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뜨거운데도 하늘은 어두컴컴하기만 하다. 이글거리는 태양도 떨어져 내리는 별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하늘만 새카만 게 아니었다. 힐다가 서 있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온통 암흑 뿐이었다. 게다가 이 어둠은 꼭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또아리를 튼 어둠은 빛을 흡수하고 공간을 좀먹는 듯이 꾸물거리며 영역을 넓혀 가더니, 급기야는 힐다의 발치까지 혀를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나도 잡아 먹히겠는걸.’

발끝에 어둠이 닿자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살아 움직이는 어둠으로 채워진 공간은 동시에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고,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지극한 허무. 저 어둠에 빠져들었다가는 몸을 빼앗겨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발을 안쪽으로 최대한 옮기긴 했지만, 이건 말 그대로 임시 방편일 뿐이었다. 어떻게든 저 어둠을 몰아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든 저 공허를 쫓아내야 하는데. 

 

그 순간, 머리 위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힐다는 반사적으로 머리에 쓴 모자를 붙잡으며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온 몸을 태워버릴 것 같은 강렬한 빛. 순간 기시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힐다 레긴레이프는 이 빛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 열기, 이 온도, 이 강도. 몇 번이나 겪어 몸이 먼저 익숙해진 스포트라이트의 빛이다. 조명이 켜진 것이다. 

이윽고 핀 조명이 차례로 빈 공간에 떨어졌다. 도처에 깔려 있던 공허와 어둠은 강한 빛에 주춤거리며 밀려났다. 베이스, 그리고 드럼. 힐다는 순서대로 떠오르는 그림자를 보며 깨달았다. 

 

여기는 무대 위구나. 

귀를 먹먹하게 하던 비명소리는 고통스러운 비명이 아니라 흥분에 찬 함성이었다. 세상은 불타고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의 무대가 만들어낸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거였다. 천장에서 이글거리는 건 태양도 별도 불꽃도 아닌 조명이었다. 공허는 이제 그들을 방해하지 못한다. 더이상 허무하지 않기 때문이다. 뛰고, 흔들리고, 움직이며 힐다의 발끝까지 닿는 건 공허가 아니라 관객들의 환호성이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힐다의 앞에는 스탠딩 마이크가 자리하고 있었다. 무거워진 어깨에는 기타가 매달려 있다. 힐다는 이유 없이 초조한 기분을 느끼며 양 옆을 살폈다. 베이스, 그리고 드럼. 악기 그림자 뿐이던 자리에는 이제 그와 함께 무대에 설 사람들이 있었다. 어쩐지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심벌과 스틱이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들리고, 심장 소리 같은 드럼이 전주를 메웠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모두가 이 자리에 있는데, 우리는 공연을 시작할 참인데. 아무 문제도 없는데 어째서 가슴 한 켠이 어둡고 불안한 걸까? 이 초조함은 언제쯤 사라질까? 

- 이봐. 

그때 옆에서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휙 고개를 돌리니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 연주자가 힐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분명히 아는 사람이다. 늘 함께 이 무대에 서 온,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인데. 어째서인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힐다는 갑자기 바보라도 된 것처럼 입을 벌린 채 ‘아…….’ 하는 소리만 반복했다. 뭐였더라? 지금까지 내가 이 사람을 뭐라고 불렀더라? 이 사람은 나의… 내게 있어 어떤 존재였지? 

- 기대에 부응해. 

익숙한 목소리는 호명을 기다리는 대신 그렇게 말했다. 

그 순간, 힐다의 눈 앞이 번쩍거리며 희게 물들고…… 


 

* * *


 

“신곡?! 이번 페스티벌에?” 

“시끄럽다. 조용히 대답해.” 

에니오의 타박에 카모가 합 입을 다물었다. 양손으로 입을 가린 카모가 데굴데굴 눈만 굴리고 있자, 에니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셋리스트는 세 곡. 두 곡은 신곡으로 한다.” 

“두 곡이나?!” 

“내가 시끄럽다고 했을 텐데…….”

“신난다! 에니오 님은 천재인가 봐!”

결국 에니오의 핀잔은 카모의 환호성에 묻히고 말았다. 그들이 이번에 공연하는 곳은 지방의 뮤직 페스티벌로 이 시기에 열리는 페스티벌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있었다. 신생 인디밴드가 이 페스티벌에 참여하려면 까다로운 오디션을 통과해야 했는데, 항간에서는 이 오디션이 ‘인디판의 등용문’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오디션도 통과했겠다, 우리 모습을 마음껏 보여주잔 거지?! 응, 이해했어!”

“……페스티벌에는 페스티벌에 맞는 곡이 필요해. 그뿐이다.” 

“신나는 걸로! 카모는 찬성이야.” 

“네 의견은 딱히 상관없다만.” 

지난 라이브 공연 이후, 세 사람을 눈여겨보던 제작사가 이번 페스티벌의 오디션을 제안했다. 페스티벌에서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이루면 연계된 기획사와의 계약도 생각해볼 수 있다는 조건도 함께였다. 그 오디션을 단번에 통과하고, 신인 밴드치고 꽤 좋은 시간과 자리까지 배정받았으니. 카모가 들뜬 것도 당연했다. 

“힐다 님?” 

“아… 예!” 

“뭐야, 왜 이렇게 정신을 빼놓고 있어! 무슨 생각 해? 걱정이라도 있는 거야? 걱정할 거 아무것도 없는데?!” 

“아하하… 아뇨…! 특별히, 걱정하고 있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힐다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거였다. 평소 같았다면 카모만큼이나 흥분해서 에니오를 열렬하게 칭찬하고 본때를 보여주자며 의기투합했을 텐데, 오늘의 힐다는 카모의 말마따나 다른 곳에 정신을 빼놓고 있는 것 같았다. 카모가 힐다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리자 에니오가 그 모습을 흘긋 바라보았다. 

힐다, 에니오, 카모. 세 사람은 ‘PAX ORBIS’라는 이름으로 밴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첫 라이브 공연을 하기 전날, ‘신 에니카모니오’ 같은 이름은 절대 쓸 수 없다며 징징댄 탓에 힐다가 겨우 지은 밴드명이었다. 이 이름이 나오기까지 100개가 조금 안 되는 후보들이 생겼다 사라졌지만, 어쨌든 최종 밴드명은 모두가 맘에 들어했다. 대부분의 일에 관심 없거나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에니오마저도 ‘그래’ 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으니. 에니오의 표현으로는 ‘최고로 마음에 든다’고 엄지를 추켜세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PAX ORBIS, 평화를 향하여. 

이 거창한 이름 아래 모인 세 사람은 같은 음악을 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색깔이 달랐다. 먼저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한 힐다 레긴레이프는 두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인디밴드 씬에 뛰어들 거란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힐다의 목표는 한 가지였다. 침체된 고향을 구해내는 것. 볼 것이라곤 숲과 계곡뿐이고, 병원도 패밀리 레스토랑도 한 시간 간격의 버스를 타고 또 한 시간을 가야 하는 마을에서 힐다의 존재는 그야말로 개천에서 태어난 용이나 다름없었다. 고향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힐다가 자신들을 구해줄 거라고 믿었고, 힐다 스스로도 마찬가지였다. 총명하고 선량하고 이타적인, 스스로에게 주어진 사명을 외면하지 못하는 힐다. 자신보다 이 마을을, 이 세상을 더 아낄 줄 아는 힐다.  

그런 힐다가 딱 한 가지 스스로를 위해 하는 행동이 있다면 바로 음악을 듣는 거였다. 특히 힐다는 신생 밴드 찾아내기를 좋아했다. 아직 이름을 알리지 못한 밴드의 근사한 음악을 들으면 꼭 보석을 찾아낸 것처럼 즐거워졌다.

그 중에서도 힐다가 가장 좋아하는 보석은 ‘에니카모니오’라는 2인조 밴드였는데, 당시에는 보컬을 담당하는 멤버가 없었다. 그러나 기타와 작곡을 담당하는 에니오, 드럼을 맡은 카모 둘 모두 SNS에서 유명한 뮤지션인데다가 드럼 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카모 플라쥬’라는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인지도가 있어 평가는 꽤 좋은 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힐다의 소망은 언젠가 한 번쯤 라이브를 들어보고 싶다 정도의 평범한 소원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언제나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 대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서둘러 간 두 사람의 길거리 공연, 가사가 없는 음악 위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 가사를 붙여 흥얼거리던 힐다에게 ‘같이 밴드 하지 않을래?!’ 라고 덥석 손을 붙잡은 건 당연하지만 카모였다.  

예나 지금이나 카모에게는 분위기를 집어삼키는 힘이 있었다. 게다가 힐다는 어울리는 걸 싫어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카모의 손에 이끌려 간 연습실에서 보컬을 테스트하고, 신이 난 카모의 제안을 듣고, 에니오의 허가가 떨어지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 싶을 정도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힐다는 쳐본 적 없는 기타를 메고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서 있었다. 

지금까지 그들은 에니카모니오 시절의 음악에 가사를 덧붙이는 식으로 공연했다. 에니카모니오의 음악이 인디 팬들에겐 어느 정도 유명했던 덕분에 새로운 보컬의 영입은 생각보다 많은 관심을 샀다. 그러니까 이번 신곡은 PAX ORBIS를 위해 에니오가 만드는 첫 음악이자, 관객들에게 에니카모니오가 아닌 PAX ORBIS를 처음으로 선보일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힐다 님도 열심히 해야 돼! 쫄면 안 돼!” 

“쫄지 않았습니다. 안 쫄 겁니다!” 

“정말이지? 약속해!” 

카모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정말이라니까요.” 

힐다가 흔쾌히 웃으며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긴장했느냐 아니냐를 따진다면 조금 긴장하긴 했지만, 걱정 때문에 말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신이 난 카모가 반대쪽 손가락도 들어 에니오에게 내밀었다. 에니오는 새끼 손가락을 걸어주는 대신, 두 사람을 차갑게 바라보다가 한 마디 던졌다. 

“기대에 부응해.” 

어라?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 * *


 

“자, 평화를 위하여! PAX ORBIS를 위하여, 건배!” 

잔 세 개가 경쾌하게 맞부딪혔다. 아직 미성년자인 카모의 잔에만 탄산음료가 채워져 있었다. 카모는 음료를 한입에 털어 넣더니, 갓 나와 따끈따끈한 튀김을 한 번에 다섯 개씩 삼키는 묘기를 선보였다. 

“뜨겁지 않습니까!? 대단합니다, 카모!” 

“이런 건─ 식은 죽─ 먹기지─!” 

카모가 자신만만하게 말할 때마다 튀김이 바삭거렸다. 신난 힐다는 카모를 따라 튀김을 한꺼번에 삼켜보려다가 입천장이 몽땅 까질 뻔했다. 카모가 힐다의 어깨를 사정없이 두드리며 웃어댔다. 

페스티벌은 성공적이었다. PAX ORBIS의 이름은 인디 씬에서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지만, 에니카모니오 시절의 음악이 아닌 신곡을 선보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힐다의 과제는 페스티벌 때까지 신곡에 맞춘 가사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처음 해 보는 과제에 머리를 싸매긴 했어도 결과물은 기대 이상이었다. 

 

힐다가 쓴 가사, 힐다를 쓴 위해 멜로디, 힐다가 처음으로 공연하는 곡. 그런 만큼 두 신곡의 분위기는 평소 에니오의 스타일보다는 힐다의 분위기에 맞춰져 있었다. 이전 악곡들보다는 밝았고, 리듬과 멜로디도 희망찬 가사에 어울렸다. 음악색이 바뀌어 호응이 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카모 왈─ ‘락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즉 열정을 다한다면 안 닿을 리가 없단 거지!” 

“이 녀석은 술도 안 마셨는데 취한 건가.”

“에이, 즐거워 보이니까 좋지 않나요.” 

에니오는 카모가 탄산음료 잔을 들고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밴드를 홍보하다 못해 안주까지 야무지게 얻어먹고 온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자리에서 대놓고 면박을 주려던 에니오를 힐다가 겨우겨우 말려 의자에 앉혔다. 어쨌든 카모에게도, 힐다에게도, 에니오에게도 오늘의 성공은 기념할 만했다. 첫 페스티벌 참여인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호응을 받았고, 제작사로부터도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으니까. 정말 락이 배신하지 않는다면, 이제 그들의 앞에는 승승장구할 일만 남은 것 같았다. 

힐다도 에니오도 술을 거나하게 마신 탓에 돌아가는 길은 기사를 불러 차를 끌게 했다. 에니오가 조수석에, 카모와 힐다는 뒷좌석에 엉망으로 기대 앉았다. 깊은 새벽, 도로는 다른 차 하나 없이 조용했고 주변을 밝히는 건 가로등 불빛 뿐이었다. 라디오 소리도 점점 잦아들 때쯤 힐다는 창문에 기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을 감은 힐다는 짧은 꿈에 빠졌다. 다시 무대 위였다. 페스티벌인가? 이미 끝나지 않았던가? 지금 막 무대를 끝낸 것마냥 숨이 가빴다. 관객석의 호응과 함성은 어쩐지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것마냥 아득했다. 분명 바로 아래일 텐데. 이상하다고 생각한 순간, 옆자리에서 우지끈 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 잠깐만요!

두동강난 베이스가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베이스를 박살낸 누군가는 악기를 미련 없이 던져 버리고 무대 아래로 발을 옮겼다. 마주보던 시선은 어느새 완전히 서로를 등지고 있었다. 힐다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일 리가 없다. 이 자리에 있을 사람이라면 한 명뿐이다.  

- 에니오!

그러나 에니오는 이름을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불러주기를 기다린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혹은, 그가 호명받기를 바란 사람이 힐다가 아니거나. 어느 쪽이든 결과는 똑같았다. 에니오는 뚜벅뚜벅 걸어 무대 아래로 사라지고, 그가 있던 자리에 남은 건 망가진 베이스 뿐이었다. 힐다는 다급하게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카모, 에니오가… 

그러나 고개를 돌린 자리에 기대하던 사람은 없었다.

- 카모? 어디 있습니까? 

드럼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공간에 검은 구멍이 뻥 뚫린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빈 자리. 허무가 좀먹고 지나간 곳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 카모, 에니오! 돌아와요. 저는…  

힐다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카모는 떠난 게 아니라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을 안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다고 해도 깔끔하게 인정하고 무대를 이어나갈 수는 없었다. 새카맣게 비어버린 무대 위. 홀로 남은 힐다가 스탠딩 마이크에 속삭였다. 

- 혼자서는 할 수 없어요……. 

물기 섞인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힐다는 씩씩하고 포기를 몰랐지만 마음이 무쇠로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애초에 혼자였다면 무대에 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혼자서는 해나갈 수 없으니, 구질구질하게라도 붙잡아야 한다. 사라진 꿈이라도 다시 되돌려야만 했다. 힐다는 떨리는 눈으로 마이크를 바라만 보고 있다가, 이윽고 울음을 삼키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어지는 깊은 심호흡. 딱 삼 초간의 정적. 

- 저 혼자서는 못 합니다!!! 그러니까 돌아와요!!!!! 

 힐다의 고함이 마이크를 지나 스피커를 통해, 공간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허무감마저 몰아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세로. 


 

*  * * 


 

“일어나. 다 왔다.” 

“벌써 다 왔어?” 

카모가 눈을 비비며 하품을 쩍 했다.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힐다는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을 채였다. 카모가 졸릴 눈을 몇 번 깜빡였다가 힐다를 톡톡 건드렸다. 

“힐다 님, 다 왔대. 우리 일어나야─”

“헉.” 

카모의 손가락이 닿는 순간, 화들짝 놀란 힐다가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며 잠에서 깼다. 아무것도 모르는 카모는 힐다와 머리를 쾅 부딪힐 뻔했다. 일생일대의 위기를 넘긴 카모가 가슴이 벌렁벌렁한 상태로 힐다를 쳐다보았다. 

“깜짝이야! 왜 그렇게 놀랐어?! 카모는 아무 짓도 안 했어!” 

“아, 아니… 아닙니다. 미안합니다, 카모. 부딪히진 않았습니까?” 

“내  끝내주는 반사속도가 아니면 큰일날 뻔했어.” 

카모가 눈을 찡긋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카모의 회복 속도가 빨라서 천만다행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짐을 내리는 에니오를 도왔다. 셋 중 가장 작은 카모가 가장 큰 드럼을 번쩍번쩍 옮기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운전기사는 주차장에 차를 댄 뒤 팁을 받고 돌아갔다. 산더미 같은 짐을 아지트나 다름없는 연습실로 옮기고 나자 드디어 한 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드디어 끝났다… 배고파졌어….”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자고 일어났잖아! 자고 일어나면 리셋이라구?” 

카모의 궤변에 에니오는 더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겠다는 듯이 혀를 찼다. 

“무시하는 거야?!” 

“무슨 대답을 해야 하지.” 

“상냥하게 대해줘. 에니오 님, 나 여기서 자고 가도 돼?”

허락을 구하는 주제에 몸은 이미 소파에 찰딱 붙어 있었다. 연습실 대관은 에니오가 도맡고 있었으니 허락을 맡을 사람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묘하게 핀트가 어긋나긴 했다. 에니오가 어이없다는 듯 카모를 한 번 바라보았다. 카모는 에니오가 평소처럼 ‘안 돼’라고 할 걸 대비해 쿠션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나 에니오의 입에서 무자비한 거절의 말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평소답지 않은 침묵만 흘렀다. 

“에니오 님?” 

“…….” 

“나 자고 가도 돼?” 

“…….” 

“된다고 생각한다?” 

카모가 귀찮게 말을 이어도 에니오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렇다 저렇다, 된다 안 된다 말도 없이 그냥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에니오 니임.”

낌새를 느낀 건지 카모가 스물스물 소파에서 빠져나와 에니오의 몸에 달라붙었다. 에니오는 반사적으로 카모를 쳐내긴 했지만 입을 열지도, 발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꼭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힐다는 문득 그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에니오가 아직도 어깨에 베이스를 매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짐을 내려놓고 자리를 잡은 힐다와 카모를 두고 에니오는 혼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처음 연습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힐다가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오른쪽 눈이 시큰거렸다. 

아, 또 꿈이다. 

꿈에서 본 모습이다. 꿈 속의 장면이 시야 위로 겹쳐 보였다. 금방이라도 에니오가 베이스를 들어 바닥에 내리칠 것만 같았다. 긴장감이 고조된다. 칭얼거리는 카모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만 간다. 가냘프게 녹아 사라지고 마는 함성소리처럼. 

“그만두자고 하려는 거죠?” 

결국 정적을 깬 건 힐다였다.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내내 투정을 부리던 카모도 단숨에 입을 다물었다. 에니오는 느리게 시선을 옮기더니,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들었지.” 

“뭐라고?!” 

카모가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에니오가 후드를 고쳐 쓰며 고개를 까딱였다. 힐다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제스쳐였다. 힐다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들은 게 아니라… 그냥 알게 된 겁니다.” 

“…….” 

에니오가 그 말을 완전히 믿는 것 같진 않았지만, 힐다 입장에선 사실이었으니 달리 덧붙일 말이 없었다. 성질 급한 카모가 한 번 더 끼어들었다. 

“에니오 님. 그만두겠다니 무슨 소리야? 뭘 그만두겠다는 건데?!” 

“말 그대로.” 

“밴드를? 음악을 그만두겠단 거야?” 

“그래.” 

말투만 담담했지 에니오의 입에서 나온 건 폭탄선언이었다. 카모가 펄쩍 뛰며 에니오를 더 세게 붙잡았다. 

“왜?! 우리 오늘 엄청 잘 됐잖아! 그만둘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 이제 제작사하고 미팅도 할 거고, 그러면 우리 이름으로 된 앨범도 나올 텐데…….”

“너희와는 원래 여기까지 하려고 했다.” 

에니오가 냉랭하게 말허리를 끊었다. 웬만해선 기죽지 않는 카모도 이번에는 조금 기세가 꺾인 것 같았다. 카모가 눈썹을 삐죽 세우고 에니오를 노려보았다. 

“우리랑은?” 

“그래.” 

“에니오 님은 우리랑은 진심이 아니었던 거야?” 

“…….” 

“우리랑 한 무대에서도 계속 그 사람 생각만 했어?” 

힐다는 모르는 이야기였다.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지만, 카모의 말 속에는 투정 어린 질투가 배어 있었다. 카모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우리랑 계속 음악을 해줘’ 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에니오도, 힐다도, 심지어 카모도 알았다. 하지만 에니오는 뻔히 보이는 수작을 받아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따금씩 자비를 베풀어줄 때가 있다고 한들, 그게 오늘은 아니다. 

“너도 거짓말로 어울리고 있던 건 마찬가지 아닌가.” 

“……에니오 님!” 

“여기엔 진짜 네가 있던 것도 아닌데. 내 말 틀렸나?” 

“그건…!” 

“…….” 

“말하지 않기로 했으면서…….” 

카모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화난 것 같기도 하고,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 상처받은 것 같기도 했다. 정작 에니오는 카모의 입을 막았으니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이 굴었다. 오늘부로 밴드를 그만두기로 한 베이시스트는 입술을 꾹 깨문 카모를 지나쳐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고리에 손을 올린 에니오가 연습실을 나서기 전에 툭 내뱉었다. 

“자고 가든지… 그건 마음대로 해.” 

연민인지 조소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한 마디였다. 남은 두 사람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 * *


 

에니오가 떠나 버리자 공기는 걷잡을 수 없이 가라앉았다. 카모는 주먹을 말아쥔 채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이렇게 기운 없는 카모를 보는 건 처음이었던지라 힐다는 조금 난감해졌다. 진정도 시키고 위로도 하고 뒷담화도 조금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힐다는 우선 카모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에니오가 찬물을 한 바가지 붓고 간 연습실에서는 무슨 수를 써도 분위기를 바꿀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생각대로, 건물에서 나와 찬바람을 얼굴에 좀 맞은 것만으로도 카모의 표정은 다소 풀어졌다. 힐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근처의 편의점으로 들어가 맥주 한 캔을 샀다. 

“힐다 님, 나도 마셔도 돼?” 

“으음… 원래는 안 되지만…” 

카모의 목소리는 아직도 울적했다. 힐다가 졸고 있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을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카모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카모는 정신없게 느껴질 정도로 활기차긴 했지만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열여덟 살인 카모가 은근슬쩍 편의점 문 옆으로 비껴 서자, 힐다는 재빨리 맥주 두 캔을 계산해서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샀어?!” 

“예! …그런데 정말 이번만입니다?! 다른 때는 안 되는 거 아시지요?!” 

“알겠어, 이번만이야! 힐다 님이 사주는 거니까!”

카모의 얼굴이 조금 밝아진 걸 보고 힐다는 준법정신과 죄책감을 잠시 밀어놓기로 했다. 카모는 생일이 한 번만 더 지나면 성인이 되니, 딱 한 번만 빨리감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미력하게나마 양심을 지킬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터덜터덜 걸어 인근의 강가로 향했다. 시간은 어느새 새벽 네 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강이 보이는 계단 아무 곳에나 걸터앉은 그들은 맥주를 한 캔씩 나눠 가졌다. 

“힐다 님은 집에 안 가봐도 돼?” 

캔을 따자 경쾌한 파열음이 울렸다. 카모가 차가운 맥주로 입술을 적시며 물었다. 

“어차피 혼자인 걸요. 괜찮습니다. 카모는요?” 

“괜찮아, 카모도 혼자니까.”

그러고 보니 그들은 지금껏 서로의 가정사나 속사정 따위를 터놓고 이야기했던 적이 없었다. 에니오와 카모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힐다는 속사정을 몰라도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격양된 두 사람의 언쟁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타자가 되고 나니 이제서야 뭐라도 더 물어봤어야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계속 혼자 지냈던 건가요?” 

“응. 가족은 어디 있는지 몰라.” 

“그렇습니까. …에니오와는 얼마나 알고 지냈습니까?” 

“몇 년 정도. 내가 먼저 에니오 님한테 말 걸었어.” 

힐다가 조심스럽게 에니오의 이야기를 묻자, 카모는 생각보다 침착하게 대답해 주었다. 카모와 에니오는 몇 년 전, SNS를 통해 알게 됐다고 한다. 당시 카모는 이미 다수의 팔로워를 가진 뮤지션 계정이었고, 인지도도 있었다. 사교성도 좋아 웬만한 아티스트들과 멘션 교류를 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반면 에니오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신생 계정인데다가 아무리 많은 ‘좋아요’를 받아도 감사 인사 한 번 올리는 법이 없었다. 그야말로 고독한 늑대 스타일이라며, 인디 뮤지션 계정 사이에서는 몇 번 화제가 됐다고 한다. 

“에니오가 카모의 대화는 받아준 거군요?” 

“응. 내 음악도 들었다고 했어.”

“잘 됐네요! 카모의 실력은 대단하니까 당연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물론이지요.” 

힐다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카모는 어쩐지 난처한 사람처럼 웃었다. 

“힐다 님, 에니오 님이 한 말 기억해?” 

“에니오가 한 말이라면….” 

“나보고 거짓말쟁이라고 했잖아. 진짜 나는 여기에 없다고.”

“그런 말을 했었죠.” 

힐다는 싸늘한 분위기를 회상했는지 조금 서글픈 얼굴이 되었다. 카모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목소리를 한 톤 올려 말을 이었다. 

“놀라지 않았어? 같이 계속 음악하던 사람이 거짓말쟁이란 걸 알게 됐잖아.”

“그건… 카모의 입으로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했어요. 알려 주시겠습니까?” 

카모가 알코올 3도짜리 맥주를 한 모금 더 삼켰다. 

“나는 힐다 님이 궁금해하지 않아서… 좀 안심했었어. 나하고 에니오 님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뭐 하는 사람인지, 어쩌다가 둘이 알게 됐는지, 싸운 적은 없는지… 이런 건 하나도 묻지 않았잖아.” 

“그랬지요. 특별한 뜻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안 궁금했어?” 

“몰라도 카모와 함께할 수 있으니까요.” 

맥주를 꼴깍꼴깍 넘긴 카모가 시원스럽게 웃었다. 

“아하하… 있잖아, 힐다 님이 거짓말하지 않는단 거. 나는 알 수 있어.”

“카모에게 거짓말한 적은 없습니다…” 

“알아. 안다고 했잖아.” 

“…….” 

“난 거짓말쟁이니까, 누가 거짓말을 하고 누가 안 하는지 알 수 있거든.”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은 좋아. 나랑은 다르니까. 

그건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에니오 님도 그래서 좋았어. 에니오 님은 거짓말 잘 못 하거든.”

“안 하는 게 아니라요?” 

“에니오 님은 못 하는 건 안 하니까 비슷해!”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고 짧게 웃었다. 맥주를 반 캔 비운 카모는 지금껏 힐다가 묻지 않았던 옛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시의 카모는 에니오에게 말을 걸면서도 대답을 듣지 못하거나, 쌀쌀맞게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 에니오는 카모에게 평범한 답장을 보냈고, 두 사람은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에니오의 메시지는 좀 특출날 정도로 짧긴 했지만 어쨌든 있어야 할 내용은 다 갖추고 있었다. 마침 두 사람은 소속되어 있는 곳이 없었고, 카모는 반쯤 농담으로 에니오에게 합주 요청을 보냈다. 

“에니오가 합주를 승낙했습니까?” 

힐다는 어느새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카모는 웃으며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모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기뻐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에니오는 군말없이 자신이 오랫동안 쓰고 있는 연습실의 주소와 시간으로 답했다. 

“그런데 조금… 불안했어. 사실 진짜 합주하러 가기 전까지, 몇 번이나 그냥 가지 말까 고민했었어.” 

“네? 어째서입니까? 카모는 합주도 좋아하고, 에니오의 음악도 좋아하지 않나요.” 

“그렇긴 하지만…” 

카모가 난처한 듯 말끝을 흐리더니 결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들킬 것 같았거든.” 

“들키다니?”

“내가 카모가 아니라는 걸.” 

“네에?!” 

힐다가 마시던 맥주를 다 뱉을 기세로 깜짝 놀랐다. 곧이어 힐다는 이 반응이 실례라는 걸 깨닫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몇 번 헛기침을 했다. 

“미안합니다.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군요….” 

“아하하하하! 괜찮아. 놀랄 줄 알았어.” 

카모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으며 힐다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방금은 거짓말 안 했는데. 나 카모가 아니야!”

“역시 설명이 필요합니다…!” 

“하하하.” 

그러니까 정확히는, 인터넷 상에서 네임드 드러머로 이름을 알린 카모 플라쥬와 눈앞의 카모는 동일인물이 아니다. 진짜 카모 플라쥬는 어떤 이유에선지 종적을 감춘 지 오래되었다. 당시 아마추어 드러머였던 카모는 우연히 그와 같은 닉네임을 쓰고 있었고, 인디 씬의 뮤지션들은 카모가 그 ‘카모 플라쥬’의 새 계정이라고 오해했다. 한순간에 관심과 칭찬을 모으게 된 카모는 해명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면… 아니라고 하기 싫었어.” 

“카모 플라쥬라고 오해받아도 괜찮았던 겁니까?” 

“힐다 님은 바보구나! 괜찮기만 한 게 아니라 좋았으니까 문제인 거라구.”

카모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카모 플라쥬가 종적을 감춰 지금까지는 문제가 될 일이 없었지만, 드러난다면 밴드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웃고 떠들며 메이저 데뷔를 이야기하면서도 카모의 마음 한 구석에는 항상 불안감이 있었다. 

내가 모든 걸 망치면 어떡하지? 

내가 한 거짓말이 모두를 망가뜨리면 어쩌지? 우리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으면 어쩌지?

내가 카모가 아니라서… 내가 카모가 될 수 없어서. 원래 내 것도 아니었던 걸 모두 잃어버린다면. 슬퍼할 자격도, 이유도 없단 걸 아는데도 흘러넘치는 슬픔을 가눌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니오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거군요.”

“에니오 님한테는 합주를 하자마자 들켰거든.”

“과연, 에니오의 귀는 못 속인다니까요.” 

힐다는 소소하게 감탄했다. 힐다도 카모 플라쥬의 연주를 여러 번 들었지만, 카모의 연주는 그를 집어삼킨 듯 똑같아서 지금까지 의심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에니오는 한 번 합주한 것만으로 알아내다니. 

“힐다 님하고 같이 메이저 데뷔를 목표를 하자고 했을 때, 에니오 님에게 말했어. 만약에 그 사람이 돌아오면, 내가 가짜란 게 알려지면 어떡하냐고.” 

“에니오는 뭐라고 했습니까?” 

“별 말 안 했어. 그냥 무서운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딱 한 마디만.” 

나는 말 안 할 거다. 

“딱 그 한 마디만…….”

미래를 보장해 주지도, 과거를 바꿔 주지도 않는 말 한 마디를 붙잡고 카모는 여기까지 왔다. 힐다는 왜 카모가 그렇게 상처 받은 얼굴을 했는지를 이해했다. 거짓말로 배를 만들어 망망대해를 건너온 카모에게 이제와서 거짓말을 그만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밴드도, 카모의 존재도 이 세계 위에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에니오가 거짓말쟁이라고 쏘아붙일 때 달리 변론할 수 있는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반격도 하지 못한 채 패배하고 만 것이다. 

“에니오 님과 밴드를 한 것도, 힐다 님을 만난 것도. 사실은 다 카모 플라쥬라는 이름 덕분이니까, 사실 진짜 내가 이룬 건 아무것도 없어. 에니오 님이 화내는 것도 당연하지. 사실 에니오 님은 내 거짓말을 지켜줄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걸! 혼자서도 엄청 잘 할 수 있고… 그리고 이제는 음악도 안 할 거라고 하니까.”

말이 길어질수록 카모의 어깨가 점점 내려갔다. 

“그래도, 에니오 님이랑 힐다 님이랑 같이 음악할 수 있어서… 난 좋았어.” 

“카모…….”

“힐다 님도 거짓말해서 미안해.”

이런 애인 줄 알았으면 그 날, 힐다 님도 내게 끌려오지 않았을 텐데. 

힐다는 카모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뒷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잠시 말이 없던 힐다는 손에 힘을 주더니, 맥주캔을 부술 듯이 꽉 쥐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카모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힐다 님?!” 

“캬, 시원하네요!” 

“갑자기 목이 말라졌어?!” 

“조금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졌어요.” 

약간 열이 오른 힐다가 한 번 더 손에 힘을 주자 캔에서 파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기합이라도 되는 것처럼 힐다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카모, 이야기해 줘서 고맙습니다. 말하기 쉽지 않을 걸 알아요. 거짓말이 나쁘단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닙니까. 잘못을 인정하는 건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응….”

“하지만 사과는 받지 않겠습니다.” 

“응… 응?” 

카모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힐다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왜냐하면 제가 아는 카모는 지금 여기, 제 눈 앞에 있는 카모 뿐인 걸요. 진짜 카모, 가짜 카모… 그렇게 구분하고 싶지 않아요. 저에게 카모는 그냥 카모예요. 제 친구고, 제가 함께 음악을 하겠다고 결정한 사람이지요. 누구의 이름을 달고 있어도 당신은 당신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카모가 가짜여서 미안하다는 말은 듣지 않을 거예요.” 

“힐다 님…….” 

“이 힐다는 에니오처럼 멋지게 말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진심입니다. 카모도 아시잖아요. 제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거.” 

힐다가 앞머리를 다듬으며 말했다. 취기를 빌려 한 말이지만 조금 쑥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순간, 카모가 예고도 없이 힐다를 덥석 끌어안았다. 힐다의 몸이 뒤로 조금 기우뚱했다가 겨우 제자리를 찾았다.

“엇.” 

“힐다 님… 고마워.” 

어쩐지 어깨가 조금 축축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힐다는 굳이 카모의 표정을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 “뭘요. 이 정도 가지고.” 힐다가 손을 들어 카모의 등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어느덧 동이 트고 있었다. 


 

* * *


 

이후 두 사람은 에니오에 대해 대화했다. 어쨌든, 지금 제일 중요한 문제는 에니오의 마음을 바꾸는 거였다. PAX ORBIS의 음악은 전부 에니오가 작곡하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에니오 말고 다른 사람과 밴드를 결성하기는 죽어도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니오 님이 정말 돌아올까?” 

조금 풀이 죽은 카모는 눈썹을 늘어뜨리고 말했다. 

“그렇게 가버렸으니까… 게다가 내가 옛날 파트너 이야기까지 해버렸잖아.” 

“옛날 파트너… 그러고 보니까 ‘그 사람’이라고 했었죠.” 

“응. 에니오 님이랑 예전에 음악을 했던 친구이자… 선생님 같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냥 있었다는 것만 알아서, 심술 부려 본 거였는데.” 

카모가 의미 없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에니오의 전화번호가 뜬 액정을 툭툭 건드렸다. 큰 맘 먹고 에니오에게 전화를 걸어 봤지만, 신호가 세 번도 가지 않아 끊겨 버렸다. 에니오는 연습실, 그리고 임시로 구한 숙소 외에 다니는 곳도 없어서 사라져 버리면 어디로 갔는지 추측할 방도가 없었다.  

“음. 우선은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만나서 생각해 보죠!” 

“만날 수 있을까? 숙소랑 연습실에는 안 올 텐데.” 

“괜찮습니다!” 

카모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힐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손을 뻗어 밤하늘을 가리켰다. 

“별이 이끌어줄 겁니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긴 했지만 힐다도 대책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 후 며칠간 힐다는 에니오가 있을 만한 곳이라면 모두 뒤졌다. 일단 지금까지 공연을 했던 라이브하우스들이 첫 번째 후보지였다. 정말 음악을 그만뒀다면 라이브하우스에 얼굴을 비칠 리가 없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애초에 에니오의 삶에서 음악을 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기에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었다. 

“아직도 못 만났나요?” 

“예에… 그렇게 됐네요.” 

“요즘 여러분이 베이시스트 찾는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미아 찾는 것도 아니고… 혹시 실종되신 건 아니죠?”

“위험한 일만 없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혹시 그런 소문을 들으면 저흰 베이시스트가 아니라 에니오를 찾는 거라고 정정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직 소식은 없지요?” 

도시에 있는 라이브하우스 여섯 곳을 돌 때쯤, PAX ORBIS에서 새 베이시스트를 찾는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여섯 번째 라이브하우스 매니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없어요. 그보다 본인이 연락을 끊었으면 그만 찾는 게 낫지 않나요?” 

“보통은 그렇겠지만요.” 

힐다가 겸연쩍은 얼굴로 뺨을 긁었다. 

“그냥 저희가 끈질긴 거라고 생각해 주시죠.” 

“뭐, 어쩌시든 제가 신경쓸 문제는 아니지만요.” 

라이브하우스 매니저는 희게 탈색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 예전에도 2인조로 다녔는데. 그건 아시나요?” 

“듣기는 했습니다만… 파트너이자 선생님 같은 관계였다고 하던데요.” 

“그랬었죠. 지금은 없지만요.” 

라이브하우스 매니저는 평이한 어조로 이야기했지만, 힐다의 고개는 휙 돌아갔다. 

“없다는 건?” 

“말 그대로. 세상을 떠난 지 꽤 됐으니까요. 몇 년이었더라… 5년이었나, 6년이었나. 아무튼 꽤 됐을 거예요.” 

“세상을 떠났다, 고요….” 

힐다가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평일 낮이라 심심하기라도 했는지, 라이브하우스 매니저 H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에니오의 가족관계나 친구는 이 바닥에 아무리 오래 있던 사람이라도 모르지만, 잔뼈 굵은 인디 뮤지션이라면 에니오와 그의 예전 파트너에 대해선 대충 알고 있다고 한다. 그는 에니오와는 다르게 호탕한 성격에, 리더쉽도 있어서 툭하면 뮤지션들을 모아 대회를 열거나 합동 공연을 준비하는 게 취미였다. 에니오는 예나 지금이나 단체 활동을 떨떠름해하는 성격이었지만, 파트너가 주도하는 행사에는 끌려가듯이 참여해 왔다. 적어도 옛날 이야기 속 에니오는 지금보다는 훨씬 밝은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파트너가 죽었을 때는, 에니오도 음악을 그만둘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각별한 사이였다면 그럴 수 있지요.” 

“하지만 그 사람은 장례식에 다녀온 다음 날, 바로 일정을 잡아서 공연을 했어요. 심지어 관객도 별로 없었는데도요.” 

“그랬습니까….” 

“평소랑 별로 다른 셋리스트도 아니었어요. 기타도 보컬도 없이 베이스 독주로 들으니 좀 심심하단 것 빼면요. 아, 딱 하나.” 

“딱 하나?” 

“그 공연에서만 연주됐던 신곡이 있었어요. 이후로는 한 번도 들은 적 없으니까, 아마 그 때만 발표하고 묻은 곡일 거예요. 노래는 꽤 좋았었는데 말이죠.” 

그 대수롭지 않은 일화에서 힐다는 뭔가 실마리를 잡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힐다는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 물었다. 

“그 노래, 제목이 뭐였습니까?!” 


 

* * *


 

라이브하우스 열 곳, 식당 다섯 군데, 심지어 으슥한 뒷골목까지 찾아봤는데도 에니오는 보이지 않았다. 꼭 이 세상에서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며칠간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온 동네를 종횡무진했더니 힐다도 슬슬 체력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힐다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한숨을 쉬었다. 

“카모에게 꼭 찾아다 주겠다고 했는데….” 

“뭘 찾아준단 거지.” 

그 순간, 상상 속에서만 들려왔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졌다. 힐다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에니오!” 

“……시끄러워.” 

“지금 그런 말 할 때인가요!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 

힐다는 혹시라도 에니오를 놓칠까 덥석 그의 팔을 붙잡았다. 에니오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내치지는 않았다. 대신 긴 한숨을 쉬었다. 

“그만두겠다고 했지 않나… 그럼 너희가 나를 찾을 이유가 어디 있지. 새 베이시스트라도 찾아봐.” 

“PAX ORBIS의 음악은 에니오밖에 못 만듭니다! 그리고, 꼭 그것 때문으로만 찾은 건 아니에요.” 

에니오가 팔을 살짝 당겼지만 힐다는 양 손에 꽉 힘을 주고 있었다. 잠시 냉담한 눈으로 힐다의 손을 보던 에니오가 “그럼, 뭐지.” 하고 물었다. 힐다는 직감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지금이 아니라면, 에니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영영 할 수 없다. 

“저는… 저는, 꿈을 자주 꿉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 

“잠깐만요, 가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세요! 딱 한 번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그러고 나서도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그땐 가도 괜찮아요. 받아들이겠습니다.” 

“…….” 

에니오의 표정이 ‘할 테면 해 봐라’ 라는 얼굴로 바뀌었다. 힐다는 조금 눈치를 보다가, 에니오가 뛰쳐나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남들보다 꿈을 자주 꾼단 건 어릴 때부터 알았습니다. 특이한 건, 그 꿈이 대체로 이루어진단 거였어요. 친구가 사고를 당하는 꿈을 꾸면, 그 친구는 일주일 내로 사고를 당했습니다. 아는 사람이 죽는 꿈을 꾸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부고 소식이 들렸지요.” 

사고, 부상, 죽음, 재난. 어떤 날에는 마을이 물에 잠기는 꿈을 꾼 적도 있다. 어린 힐다는 불안감에 당장 뭐라도 해야 한다고 어른들을 졸랐다. 그러나 고작 어린아이의 꿈 하나를 믿고 예산을 들여 댐을 짓거나 집들을 수리할 수는 없었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가뭄이 길었다. 비가 간절한 시기에 홍수를 대비하잔 건 그야말로 뚱딴지 같은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제가 꾸는 꿈은 어째서인지… 대부분 나쁜 꿈이었습니다. 누군가 다치거나, 죽거나, 중요한 걸 잃어버리는 꿈. 사람들은 믿지 않았어요. 마을이 홍수 때문에 큰 피해를 입기 전까지는요.” 

“그 재해도 예지몽을 꿨나?” 

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끼던 물건도, 좋아하던 장소도 모두 물에 쓸려 갔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 곧 지원을 받아 집을 다시 세우긴 했지만, 마을은 이미 예전과는 너무 다른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 번 사라진 건 돌아오지 않는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에니오도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격언이었다. 

“그 이후로, 마을 어른들은 제 꿈 이야기를 귀담아 듣기 시작했습니다. 불길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그런 분들께도 불행한 일이 닥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꿈속에서 이전까지는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소리?” 

“예… ‘도와달라’는 소리요.” 

에니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힐다는 한 손을 가슴께에 얹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건 너무 처절하고,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소리라서… 꿈을 꾸다가도 가슴께가 찢어질 듯이 아파져요.”

도와줘. 

도와주세요. 

다치지 않게 해줘. 

잃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우리를 구해주세요. 

이 끔찍한 일들로부터, 예정된 미래로부터. 

파멸로부터, 멸망으로부터. 

거대한 상실과 슬픔으로부터.

“…… 안 좋은 건 다 가지고 사는군.” 

“하하하. 저도 압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요즘엔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대신 다른 소리들이 들립니다.” 

에니오가 뒷말을 기다리는 듯 눈을 깜빡였다. 힐다가 그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이젠 비명 소리, 구해달란 소리가 아니라… 함성 소리가 들려요.”

언제부터였을까. 물 속에서 외치듯이 막연하고 먹먹했던 소리는 힐다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에니오와 카모와 함께 음악을 시작했던 날부터… 제 세상도 바뀐 것 같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외치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무대 위를 향해 외친다.

조금 더!

조금 더 불러줘! 

이 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심장이 뛰는 걸 이토록 생생하게 느낀 적은 없었어. 

한 번 더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해줘. 

이 끔찍한 일들로부터, 예정된 미래로부터, 파멸로부터, 멸망으로부터, 거대한 상실과 슬픔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줘! 

너의 노래로! 

“그건 정말 기분이 좋아요.” 

힐다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리 뛰어나도, 아무리 닥칠 일을 알고 있어도 바꿀 수 없는 미래란 있다. 고작 말 한마디로, 행동 하나로 모든 불행을 막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을 끝도 없이 이어가는 것, 리듬으로 심장을 뛰게 하는 것, 마음을 담은 가사와 멜로디로 사람들을 환희의 장면에 불러오는 건. 무대 위에서라면 할 수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만…….” 

“그러니까 저는, 에니오한테 제가 음악을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힐다가 어느새 양손을 에니오에게서 떼고, 스스로의 가슴에 얹었다. 손 아래, 피부 아래로 피가 흐르고 혈관이 맥동하며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처음 PAX ORBIS라는 이름을 달고 무대에 선 날, 객석을 내려다본 힐다는 경탄을 참을 수 없었다. 이건 마치… 별이 뜬 하늘 같지 않은가. 수많은 눈동자가, 수많은 별들이, 이토록 가까이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니. 이 모든 사람들이 나의 음악을 듣는 동안 같은 시간 속에 머무를 수 있다니.

이렇게도 사람을 도와줄 수 있구나.

흐르는 음률 속에서 사람들은 부유하는 별들처럼 연결된다. 같은 세계를 보고, 같은 시야를 공유한다. 힐다는 언제나 남들을 구하기 위해 살아왔다. 구원의 말은 너무 연약해서 닿기도 전에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흔적도 없이 불타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음악은 다르다. 음표와 박자, 문장에는 힘이 있어서 얼마든지 사람들을 묶어줄 수 있다. 얼마든지 그들과 연결될 수 있다. 

외롭지 않을 수 있다. 

“저는 두 사람과 함께 무대에 오른 날부터, 세계에 연결되는 방식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음악은… 제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이에요.”

“…….” 

“에니오가 ‘문’을 쓴 이유도, 그런 거지요?”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거지….” 

“……나쁜 뜻으로 알아본 건 아닙니다!” 

힐다가 지레 찔린 얼굴로 변명했다. 에니오의 표정은 아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닌 것 같았다. 

“에니오가 음악을 그만두겠다고 한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에니오도 분명… 연결되기 위해서 음악을 하는 거라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미 멋대로 결론을 내렸잖아.” 

“아니라고 하실 건가요?” 

에니오는 가만히 힐다를 바라보다가, 이렇다 할 대답 대신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7주기였어.”     

“…….” 

“그 녀석은 나 말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기일인데도 납골당이 텅텅 비어있더군. 웃기지 않나… 그런데도 나 혼자 무슨 일만 있으면 거길 드나들고 있으니.” 

“에니오…….” 

“‘문’은 이제 사라졌는데… 말이지.” 

잠깐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던 에니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거다… 음악을 할 때는 그 녀석을 잊을 수 없어. 벗어날 수도 없지. ‘문’은… 내가 만든 장송곡이었어. 내가 만든 모든 노래는 그 녀석을 벗어나지 못해. 하나같이… 죽은 사람을 위한 장송곡이야. 네게 주는 노래를 쓰면서 느꼈다.” 

그러니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밴드도, 음악도. 아무리 희망한 멜로디에 희망찬 가사를 달고 있어도, 그 본질은 추모를 벗어나지 못하니까. 이대로다간 영원히 그를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마음을… 접어버리겠단 건가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 어쨌든 벗어나면, 다신 생각하지 않게 될 테니까.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건….” 

“왜, 비겁하다고 할 셈인가.” 

“아뇨, 그냥… 괴로울 뿐 아닙니까? 저는… 에니오가 괴로운 건, 싫어요.” 

어린애가 떼를 쓰는 것처럼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에니오의 얼굴은 역시나 ‘어린애같이 말하는군’ 이라고 할 것 같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정말이에요.” 소심하게 덧붙인 힐다는 다시 조금 눈치를 보다가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에니오의 음악이 모두 한 사람을 위한 거여도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지 않은데, 네가 괜찮아서 뭐 하자는 거냐.”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에니오는 모든 곡을 장송곡으로 쓰게 될 거라고 했지만… 에니오가 제게, 그리고 카모에게 곡을 주고, 그 곡이 세상으로 뻗어나가면. 그건 더 이상 단순한 장송곡이 아니에요.” 

“그럼?” 

“어떤 사람에겐 에니오의 곡이 자신을 축하하는 것처럼 들릴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에니오의 곡에게서 위로를 받을 거고요. 그럼 위로곡이 되겠지요. 자신을 환영한다는 기분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환영곡도 될 수 있습니다!” 

“…….” 

“그러니까, 제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무슨 말이 이어질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힐다가 심호흡을 하고 뒷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에니오가 선수를 쳤다. 

“……너흰 정말 끈질기다. 귀찮아.”  

“알고 있습니다. 에니오도 저희가 끈질긴 건 아시지 않나요.” 

“그래, 알아.” 

“그럼…….” 

힐다가 은근슬쩍 손을 뻗어 다시 에니오의 손을 쥐려고 했다. 이번에는 에니오의 행동이 한 발 더 빨랐다. 휙 손을 빼 스스로 팔짱을 낀 에니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 묻겠는데.” 

“네!” 

“이것도 꿈에서 봤나?” 

그 말을 듣자, 힐다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 * *


 

- 에니오. 

베이스를 튜닝하던 에니오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막 녹음이 찾아들기 시작한 초여름이었다. 진과 에니오는 연습실 대관비를 연체한 탓에 연습실에서 쫓겨났다. 연습실을 쓸 수 없다면 바깥에서 연습하면 된다며 그는 에니오를 이끌고 정자로 향했다. 에니오는 따스한 햇살과 산들바람이 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싸구려 선글라스까지 낀 파트너를 보고 어쩔 수 없이 어울려 주었다. 

- 넌 왜 음악을 하는 거지?

- ……갑자기 이런 건 왜 물어. 

- 이런 얘기는 한 번도 한 적 없잖아. 중요한 문제라고. 

에니오는 순식간에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진의 성격을 생각하면 대충 얼버무릴 수도 없었다. 진이 얼마나 끈질긴지는 에니오가 가장 잘 알았다. 에니오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베이스 현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 이유 같은 게 있겠어? 네가 하니까 따라 한 거지. 

- 예상한 것 중에 가장 멋없는 대답이군. 

- 뭘 예상했는데. 

- 여러가지. 좀 더 멋진 이유는 없나?  

- 대답해줬으면 됐잖아… 

질린 얼굴을 하는 에니오를 보고 진이 씩 웃었다. 

- 뭐, 솔직하게 대답해줬으면 됐어. 

- 그러는 너는. 

- 하하. 그 질문 기다리고 있었지. 

- 짜증 나는데…

에니오가 눈썹을 찡그리자, 진은 선글라스를 매만지며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 그때그때 달라. 

- 네 녀석… 대충 대답했지. 

-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음악은 듣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잖아. 

에니오가 ‘들어나 보자’ 라는 얼굴로 진을 바라보았다. 진은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어갔다. 

- 어떤 사람에게는 내 음악이 자신을 축하하는 것처럼 들리겠지. 그 사람은 내가 자길 축하하기 위해 음악을 한다고 생각할 거야. 또, 어떤 사람에겐 위로가 될 수도 있어. 그 사람은 자길 위로하기 위해 음악을 했다고 생각할 거고. 내 노래를 들으면서 환영받는단 기분이 든다면, 그 사람에게 나는 환영해주기 위해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 될 거야.

- ……역시 대충인 것 같은데. 

- 대충이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내 음악은 일종의 문이 되는 거지. 

여는 사람에 따라 다른 장소로 갈 수 있고, 수많은 사람들을 연결시켜줄 수 있는. 

원하는 곳으로 듣는 사람을 데려다줄 수 있는 그런 문. 

- 그리고 에니오, 네 음악은 언제나 나를 위한 문이 되어줬으면 좋겠어. 

- 갑자기. 

- 내가 어디든 갈 수 있도록. 

그렇게 말하는 진은 전혀 농담하는 것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 

어디로든 자유롭게 갈 수 있게, 그리고 언제라도 네 곁으로 돌아올 수 있게. 

설령 멀리 떠나더라도, 네 음악이 있는 곳에 내가 찾아올 수 있도록. 

나를 연결해 줘. 


 

* * *


 

오후 5시 30분. 

이제 30분 뒤면, PAX ORBIS의 첫 무대가 시작된다. 신예 멤버를 영입한 ‘에니카모니오’가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한 지도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소규모 라이브하우스 공연부터 페스티벌까지, 빠르게 이름을 알린 그들은 마침내 첫 앨범 발매 기념 라이브를 앞두고 있었다. 

“에니오 님! 힐다 님! 중요한 날이라고… 긴장하면 안 돼!” 

“네가 제일 긴장한 것 같다.” 

“그, 그런가!? 그럴지도 몰라!” 

“카모, 진정해요. 심호흡 합시다, 심호흡!” 

막 뒤편의 백스테이지, 카모와 힐다가 수선을 떨며 심호흡을 반복했다. 에니오는 감흥 없는 눈으로 베이스 튜닝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동안의 모든 연습과 고난은 바로 이 날을 위해 쌓아올린 것이지만, 동시에 이 날이 그들에겐 진정한 시작이기도 했다. 

“자, 스탠바이 하세요! 곧 공연 시작됩니다!” 

스태프의 안내와 함께 세 사람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카모는 드럼스틱을 꽉 쥐고, 힐다는 마이크를 다시 테스트했다. 에니오는 현에 손가락을 얹은 채로 가만히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카모가 불쑥 물었다. 

“힐다 님, 오늘은 꿈 꿨어?” 

그러자 힐다는 카모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비밀입니다.” 

온점과 함께 막이 오른다. 


 

* * *


 

수많은 군중이 커다란 무대를 둘러싸고 몰려들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천장에서는 온 몸을 불태워버릴 것만 같은 조명이 쏟아지고 있고, 앰프에서는 최대 볼륨으로 리듬과 멜로디가 쏟아진다. 힐다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땀범벅이 된 채 신이 나서 연주를 이어가고 있는 카모와, 드물에 입에 미소를 건 에니오가 보였다. 두 사람 모두 형형색색의 조명에 뒤섞여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이건 꿈이다. 

힐다는 손쉽게 깨닫고, 이어서 생각했다. 

이건 예지몽일까? 

하지만 이 질문 역시 쉽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예지몽 따위가 아니다. 그저 가장 즐거웠던 순간, 가장 마음을 쏟은 순간을 꿈꾸고 있는 것뿐이다.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 힐다 님!

- 네, 카모! 

카모의 목소리에 힐다가 활기차게 대답했다. 카모는 그 호명이면 충분하다는 것처럼 까르르 웃었다. 그 소리에 따라 웃던 힐다가 물었다. 

- 카모, 지금 행복합니까? 

카모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눈이 사라져라 웃으며 답했다.

- 응! 

그 대답을 듣자 어쩐지 안도감이 차올랐다. 가슴이 벅찬 기분에 힐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붉은 조명을 받으며 타오르는 에니오가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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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 정보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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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다 레긴레이프
Hilda Reginleif
제작
레망, 민우, 청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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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오 진
Enyo 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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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모 플라쥬
Camou f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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