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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고등학생 트로이는 우연히 타임리프 능력을 얻은 뒤로 인생이 훨씬 수월해진다. 그런데 트로이는 실수로 맛있는 야끼소바 빵을 떨어트렸던 날을 없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타임리프를 하고, 그 뒤로 일이 꼬여만 간다. 몇번이나 과거로 돌아가 실수를 없던 걸로 하던 트로이는 결국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며 타임리프의 비밀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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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 97분

시간을 달리는 소녀

時をかける少女

  그래서, 수없이 시간을 돌려 트로이가 무엇을 얻었냐고 하면, 세계는 그에게 망설임 없이 ‘글쎄’라는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처음 시간을 돌릴 수 있게 되었을 때 트로이는 자신이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싶어 뺨을 꼬집었다. 손가락 끝으로 전해져 오는 생생한 고통이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진짜고 현실이라 말해주고 있었다. 그걸 알게 된 순간부터 트로이의 생활은 변했다. 실수로 맛있는 야끼소바 빵을 떨어트렸던 날을 없던 것으로 만들자. 문제 풀이에 실수해 수학 선생님에게 혼났던 날도 없던 것으로 만들자. 그리고, 실수로 담임 선생님에게 좋아한다고 말해버린 날도 없던 것으로 만들자. 하얗고 피곤한 인상의 선생님이 당황한, 그러나 단호한 표정을 지었을 때는 아무리 무던한 트로이라도 상처받을 것만 같았으니까. 생활은 편해졌다. 온갖 실수로 점철된 하루를 망설임 없이 덮었다. 온통 좋은 일만 생겼다. 친구들과 더 놀 수 있었고, 좋아하는 선생님도 아낌없이 자신을 칭찬했으니까. 이 능력이 영원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행복해진 자신을 비웃듯 세상에 하나둘씩 구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야끼소바 빵을 떨어트린 날, 새하얀 옷에 소스가 잔뜩 묻었다. 담임 선생님이 보다못해 물을 묻힌 손수건으로 억세게 닦아주며 트로이를 나무랐다. 다른 사람과 닿는 것을 즐기지 않는 그 선생님이 빳빳한 손길로 저를 챙겨주는 게 좋았다. 얼룩덜룩해진 옷조차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야끼소바 빵을 떨어트리지 않자, 선생님은 그날 실수한 다른 아이를 신경 써주었다.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문제 풀이를 실수한 날, 수학 선생님은 트로이를 따로 불러내 아무리 운동부라도 공부에 소홀해선 안 된다며 큰소리를 쳤다. 그런 것은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괜찮았다. 그러나 문제 풀이를 제대로 맞추자,  선생님은 그날따라 문제 풀이가 더딘 다른 아이에게 언성을 높였다. 그 아이는 수업이 끝나고도 한참 고개를 묻고 슬퍼했다. 그런 다음날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는 없어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순 있었다. 자신이 빠진 자리를 그 애가 대신해 버린 거다.

   그리고 좋아한다고 말해버린 날……. 어쩌면 이것만큼은 잘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은 자신도 시간을 돌릴 수 있다고 했다.

  선생님은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고 했다.

  저 먼 곳에서, 박물관에 처박혀 누구도 찾지 않는 오래된 골동품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어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전부 거짓말이라면 좋을 텐데.

 

 

   시간은 유한했고 기회도 영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장받았던 시간의 마지막은 어이없게 끝나고 말았다. 아무리 튼튼하고 빠른 운동부 학생이라고 해도, 달려오는 트럭을 어떻게 피할 수 있었겠는가. 선생님은, 히로토 윤은 미래로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시간을 멈췄다. 우레와 같은 충격이 몸을 강타하지 않아, 질끈 감은 눈을 뜬 트로이는 손을 내밀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았다. 모두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멈춰 있었다. 세상에서 오직 둘만이 숨을 내쉬는 존재였다.

   “선생님…….”

   “결국 써버렸네.”

   “죄송, 죄송해요.”

   “괜찮아. 네가 무사하면 그걸로 됐어.”

   “하지만 선생님은 이제…….”

   “돌아갈 수 없겠지.”

   손에 힘을 잡아 끌어주면서도, 시선 끝은 더 먼 곳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어서. 그가 이 세상에 붙들렸다는 기쁨도 잠시였다. 이 사람이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슬펐다. 내밀어진 손의 온기를 느끼면서도 트로이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히로토를 기쁘게 만들어주고 싶다. 곁에 있어 주길 바라는 이기심보다 그러길 선택하고 싶다고. 힘없는 히로토의 웃음과 함께, 시간은 돌아갔다.


 


 

   마지막 기회를 써버렸다는 생각. 대걸레의 손잡이를 잡고 멍하니 서 있던 트로이의 뒤통수를 소리 나게 때리고 가는 친구가 있다. 얼얼한 통증과 함께 눈물이 찔끔 흐른다. 돌아가지 못하게 된 선생님은 괜찮을까. 오늘은 출근하지 않았다던데. 어쩌면 이대로 영영 볼 수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팔에 새겨진 숫자가 아려오는 기분이었다. 트로이는 괜히 손을 들어 올려 팔을 긁적였다. 그러고보니 어제 이후로는 확인한 적이 없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제 빨갛게 달아오른 뒷머리도 잊은 채 팔뚝을 걷어버렸다. 선명하게 새겨진 숫자 01. 이거라면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선생님은 미래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프지도 않냐는 말들이 멀어졌다. 트로이는 지체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기회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트로이는 야끼소바 빵을 떨어트렸다. 하얀 옷에 얼룩덜룩한 양념 소스가 묻어 더러워졌다. 수학 시간에는 깜빡 졸았다. 풀이를 실수해 선생님에게 크게 혼났다. 좋아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이제 미래로 가야 하니까.

 해가 져가는 시간, 제 가방을 싸들던 히로토 앞에 쭈뼛대며 등장하는 것으로 이별이 시작된다.

   “선생님, 저, 할 말이 있는데요…….”

   “급한 일이야?”

   “그, 그런 건……아니……. 그렇지만 꼭 해야 할 말이에요.”

   “그래? 그럼 돌아가면서 이야기할까.”

   가방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 구두를 고쳐 신은 히로토 옆에서 트로이는 몇 번이고 할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강변이 있었다. 깊지는 않지만, 서로의 얼굴이 환히 비쳐 보일 정도로 맑은 물이었다. 저는 자전거로 오가는 걸 좋아해요. 그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히로토가 자전거의 뒷자리에 탑승한 건 행운이었다. 한참이나 얼굴로 쏟아지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두 명은 말이 없었다. 용기 내 침묵을 먼저 깬 건 트로이였다.

   “선생님, 저……. 알아요.”

   “뭘?”

   “선생님이 미래에서 왔다는 거. 그래서, 어, 돌아가야 한다는 거.”

   “…….”

   “그리고…오래된 박물관의, 골동품을 좋아해서 보러 왔다는 것도…….”

   “트로이.”

   “맞죠?”

   바람이 달라졌다. 고개를 끄덕이는 움직임이 미세하게, 딱딱한 자전거의 몸체를 통해 전해져 온다. 부끄러움은 전부 잊어버리자. 이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니까.

   “그 골동품……제, 제가 잘 지키고 있을게요. 그럼 미래에서도 볼 수 있을 거니까. 어때요?”

   입을 달싹이던 히로토는 힘겹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뭐라고 해도 꺾이진 않겠구나. 고마워, 트로이.”

   페달을 돌리는 속도가 느려졌다. 트로이는 이제 그 말로도 괜찮은 것 같았다.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그만큼 듣고 싶은 말도 있지만. 선생님은, 히로토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조금 슬퍼도 괜찮았다. 히로토가 슬퍼하는 걸 보는 것보다 나았다.

   누군가 멈추라고 명령한 적 없는데도, 어느새 자전거는 바람에 못 이기듯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손잡이를 꾹 잡은 트로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눈에 보이는 건 슬퍼 보이는 표정의 히로토였다. 분명 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을 알 수 없어 고개가 저절로 옆으로 돌아갔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히로토는 몇번이고 돌아간 시간 속에서 어리숙하지만 동시에 믿음직한 소년이 자신에게 직선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까, 그래서다. 당장 보답할 수 없는 마음 앞에서 깨달아버린 것이었다. 이곳으로 돌아오게 만든 건 사실 그 물건이 아닌 네 마음이었다고.

   “전부 알고 있어. 네 마음도. 내 마음도. 그러니까…….”

 

   히로토가 고개를 숙였다.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오직 그 바람만이 서늘하게 귀를 스쳤다.

 

   “미래에서 기다릴게.”

   “네. ……저, 갈게요. 뛰어서 갈게요.”

 

   눈을 깜빡이자, 혼자였다. 허공에 뻗은 손은 무엇도 만질 수 없었다. 하지만 야끼소바 빵을 떨어트리고, 수업 시간에 크게 혼나고, 하지 못한 말을 열심히 삼킨 끝에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미래에 대한 약속이라면. 시간을 몇번이고 돌려, 마침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트로이는 골동품을, 이 마음을 지키자고 결심했다. 가슴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가까이에 다가왔던 온기가 잊히지 않는다. 이 시간의 끝에 당신이 있을 것을 알기에, 나는 앞으로 수없는 세월을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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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 정보

​출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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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Troy
뻬주, 도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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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토 윤
Hiroto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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