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하는 전생과 현세의 기억― 평범한 고등학생 루나웨이는 기묘한 꿈을 꾼다. 그것은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있는 과거의 자신, 그리고 꿈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한 남자. 유난히 앨리스를 잘 따르는 어른스러운 분위기의 옆집 소년 타카히사는 그것이 자신과 루나웨이의 전생의 기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에게 남은 것은 9년의 외로운 기억.
점점 되찾아가는 과거의 기억들, 그리고 서로의 뒤틀린 이해와 비밀에 싸인 진심, 능력과 과거의 각인. 과연 이들이 서로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본심은?
1993 | OVA 6화
나의 지구를 지켜줘
ぼくの地球を守って
여자는 홀로 빈 연구실을 지키고 있다. 주기적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아야 하는 일을 자진해서 맡았다. 구경거리를 위해 잔업을 맡기고 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한사코 함께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 것이라고 부추기던 동료에게 “감사제라면 예전에 본 적이 있으니까.”라는 말로 사양까지 하고 나서야 얻어낸 자리였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때도 감사제를 보러 온 인파를 구경이나 하나 돌아왔으므로 아마 그가 안심한 종류의 상상과 같지는 않았을 거다. 이런 말까지 해가며 사람을 물리고 혼자 남은 것을 생각해 보니 어쩌면 생각보다 휴식이 간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사자림을 믿고 키체스를 공경했으나, 아름다운 춤이나 노랫소리 하나에 피로를 날려 보내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여자는 체구나 보이는 겉모습 보다 확실히 강골이긴 했지만, 요즘의 강행군은 아무리 그녀라도 버티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이제 한 달 후면모성을 떠나 Z-KK101를 관측하는 위성의 연구소로 간다. 떠나기 전까지 처리해야 할 일도, 정리해야 할 일도 산더미 같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곧 떠난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행인 점은 이제 그녀에게 왜 자진해서 그런 자리로 갔냐는 질문을 듣지 않게 되었다는 것 정도다. 당장 지난주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인사 뒤에 그 의문을 붙였다. 처음 그 질문을 들었을 때 그녀는 당황한 자신에게 놀랐다. 이상한 질문도, 듣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들을 만족시킬 만한 답이 자신의 안에도 없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가 경솔하다던가 그런 한직으로 가 커리어를 망칠 거냐는 애정은 섞였지만 전혀 감사하지만은 않은 충고들을 듣기도 했다. 오직 들려주기 위한 몇 가지 레퍼토리의 대답을 준비하고 나서야 해방 될 수 있었다. 지루하고 귀찮은 과정과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한 가지만은 확실해졌다.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해오던 일에 불만을 가지던 건 아니다. 오히려 자부심도, 애정도 있는 편이다. 객관적으로 그녀는 우수한 인재였고 어디든 원하는 곳에서 일할 수도 있었다. 그 삶은 풍족하고 안정적이었을 것이다. 누구나 부러워하고 자신도 만족스러운 삶이 분명하다. 그것을 버리거나, 떠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권태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 동기는 과연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하지만 확실히 계기라면 있다. 그 남자와의 만남이다.
간간이 쪽잠이라도 자두려고 남았던 건데. 정신이 각성이 되어버린 탓인지 잠이 오지 않는 상태가 도리어 괴로워져 모니터 위로 뜬 마지막 알람을 기록해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전부터 눈에 들어오던 모니터 뒤쪽의 시든 화분에 물이라도 줄 요량이었다. 물을 떠오기 위해 빈 머그잔을 들고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마치 생각이라도 읽은 것 같은 타이밍이다. 저 남자는… ….
‘어라?’
“어라?”
어깨를 건드린 것은 동급생인 N이다. 주변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조차 잊고 생각에 빠져있던 루나웨이가 놀라 N을 바라보았다. N은 그 태도가 웃긴다는 듯 조금 웃고는 말했다.
“슈에. 아직 하교 안 해?”
“아, 금방 가려고 했어.”
“요즘 이상하네. 가끔 멍하니 있고. 뭔가 고민이라도 있어?”
“그런 건 아니야.”
하고 루나웨이는 조금 얼버무리며 웃었지만, 사실 N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가끔 멍하니 있는 것도, 고민이 있는 것도 맞았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털어놓을 수는 없다. 뱉어봐야 고작 ‘이상한 꿈을 꿔서.’ 정도일 텐데 무슨 꿈이냐고 질문이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또 다시 곤란해진다.
“오랜만에 같이 카페라도 갈래?”
“고맙지만 오늘은 안돼.”
“또 이웃집 동생 봐줘야 해?”
“응.”
“고생이네~ 친동생도 아닌데.”
루나웨이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N과 함께 교실을 나서 신발을 갈아신고 학교를 빠져나오는 동안, 동시에 익숙한 꿈속에서 함께 빠져나온다. 입 안으로 삼킨 대답대로 그녀는 요즘 이상한 꿈을 꾸고 있다. 그 꿈을 생각하거나, 꿈에 몰두하고 있는 시간을 생각해 보면 지금이 꿈이고 오히려 꿈에 빠져있는 시간이 현실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비중이었다. 하지만 내가 꿈속에서 외계인이었고……. 역시 이런 건 말할 수 없다. 진심으로 걱정이라도 받으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꿈은 꿈일 뿐이니 잊으라고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대답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일련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후라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성적에는 지장을 미치지 않은 셈이니까. 특별할 거라곤 없는 일상적인 하루하루를 보내던 시기였다. 달라진 것 정도라면 오랫동안 비어있던 옆집으로 이사 온 새로운 이웃이 생겼다는 점 뿐이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긴 저수지를 따라 걸어야 한다. 루나웨이는 이쯤이겠지 싶은 기분이 들었을 때 고개를 들었다. 저수지에서 인도로 올라가는 층계참 위에 한 소년이 앉아있었다. 소년의 채도 높은 붉은 고수머리는 언제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소년의 이름은 모리 타카히사. 바로 얼마 전 그녀의 옆집으로 이사 온 집의 아이였다. 부모의 이혼으로 원래 살던 곳을 떠나 어머니와 함께 이 동네로 오게 되었다는 제법 딱한 형편으로 루나웨이의 부모님의 측은지심을 자극한 그 소년은 곧 루나웨이의 소관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타카히사의 어머니가 밤낮으로 일을 하며 아이를 돌보지 못하니, 옆집인 우리가 도와주자나 뭐라나. 일로 인해 밤낮으로 바쁜 것은 루나웨이의 부모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건 에둘러 루나웨이에게 전달되었다. 루나웨이는 저 나이대의 초등학생 남자애를 돌봐줄 일이 뭐가 있겠냐고 생각하면서도 그러겠다고 했다. 또래랑 노는 것이 가장 재미있을 나이가 아닌가.
그러나 모리 타카히사는 루나웨이가 상상하던 그 나이대의 어린애와는 많이 다른 모양이다. 타카히사는 종종 저 자리에 앉아 루나웨이가 하교하는 것을 기다리고는 했다. 일부러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지나가는 그녀를 보고 말을 거는 일도 없다. 그러다가 이렇게 그녀가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치면 그때에서야 일어서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는 것이다. 루나웨이는 타카히사를 알게 된 이후 그가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어젯밤 루나웨이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온 타카히사의 어머니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원래 사람을 잘 따르는 아이가 아닌데 루나웨이 양을 잘 따르네요. 또래와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이에요.
어머니의 마음은 어쩔 수 없겠지만 루나웨이는 그것이 전혀 할 필요 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타카히사에게는 무시당하는 아이처럼 주눅이 드는 면이 전혀 없었다. 부모의 이혼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독립적이고 어른스러운 아이라고 했다. 루나웨이가 그에게 받은 첫인상은 그 평가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타카히사, 역시 친구 없지?”
“안 만드는 거야.”
그러니까 저런 태도가. 대답은 애다웠지만 태도가 전혀 분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런 대답을 원했지? 하고 들려주는 것 같지 않은가. 계단을 다 내려온 타카히사가 루나웨이의 옆에 나란히 섰다. 애늙은이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옆에 오니 겨우 가슴께에 닿는 키 차이가 느껴져 조금 귀여웠다.
“그래도 만들어보는 건 어때? 아주머니가 걱정하시는걸.”
“어머니는 쓸데없는 걱정이 많으니까.”
“그야 아들의 일인걸.”
“그렇게 무른 사람은 처음 봐.”
원래 초등학교 남자애란 이렇게 복잡한 걸까? 어머니를 향한 초등학생 아들의 발언 답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며 루나웨이는 살짝 고개를 내려 타카히사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꿈속에 나오는 외계인보다 이 애가 더 외계인 같다.
“타카히사는 어떤 아이가 좋아?”
“수준이 맞는 사람.”
“좀 더 나이에 맞게.”
“똑똑한 사람.”
“헤에.”
내가 어렸을 때도 이랬을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 정도로 똑똑했으면 좋겠어?”
“궁금한 것에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정도면 돼.”
“궁금한 게 뭔데? 수학?”
“모르면 가르쳐주게?”
“초등수학 정도면 뭐.”
“좋아. 나중에 물어볼게. 수학은 아니지만.”
“숙제면 스스로 해야 해.”
이 대목에서 타카히사가 웃는다. 농담은 아니었는데. 해를 등지고 걷고 있으려니 앞으로 길게 그림자가 졌다. 나란히 선 그림자가 마치 걸리버와 소인 같았다. 옆에 있는 타카히사도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루나는 내 친구야?”
“안되나?”
“어머니가 시켜서?”
“뭐, 그렇지.”
말하고 나서야 너무 솔직했나 싶어 아차, 했다. 표정을 보고 싶었는데 동생도, 친척들도 전부 또래인 루나웨이는 어린아이와 나란히 걸으면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쪽은 타카히사인 것 같다. 그는 언제나 같은 전혀 어린아이 같지 않은 여상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도 하나만 기억해 줘.”
“뭐, 뭘?”
“나도 어린아이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고.”
역시 삐진 거지? 루나웨이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또다시 꿈이다. Z-KK101 관측기지의 연구원들이 전부 교체된다고 했다. 애초에 엄중한 임무를 가진 프로젝트도 아니니 경질이 된 것은 아니고, 원래 몇 년인가의 주기로 교체가 된다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 프로젝트 자체가 일종의 경질 아니냐는 의견도 들은 적이 있다. 고향에서 떠나 좁고 차가운 기지에서 몇 년 동안 상관없는 행성을 관측하는 일은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새로운 멤버의 모집을 위한 홍보의 일종으로 사람이 가장 많이 오가는 홀에 특설 전시를 열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는데 있는 거라곤 고작 행성을 찍은 사진 액자와 설명뿐이다. 곁에 놓아둔 소책자는 전혀 누구든 가져간 흔적이 없어 보였다. 이 전시를 기획한 홍보 담당자야말로 Z-KK101 관측기지로 보내버려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림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바로 그 담당자 본인이거나, 전시의 일부가 아니라면.
얼핏 평범한 벽처럼 보이는 곳을 계속 바라보며 서 있는 남자가 있으니 지나가던 행인 몇몇이 그를 따라 벽에 시선을 두고 지나가곤 했다. 그녀는 남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사진을 보기에 앞서 설명을 읽었다. 모성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은하계에 속한 행성.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을 가진 건 그 은하계에서도 오직 그 별 뿐으로, 아마 지금도 어딘가에선 시끄럽게 일어나고 있을 성간의 전쟁에서도 홀로 외따로 떨어져 원시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설명을 다 읽을 때쯤 시선이 느껴졌다. 사진 앞에 계속 서 있던 그 남자다. 선수 치듯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프로젝트 신청할 거야?”
“네?”
“여기에 30분째 서 있었는데, 그걸 읽는 건 네가 처음이거든.”
“그런가요?”
남자가 한발 물러섰다.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사진 쪽으로 다가갔다. 어두운 우주에 홀로 생명을 품고 있는 행성의 사진은 어쩐지 고독해 보인다.
“꽤 재밌어요.”
“제대로 읽지 않았어.”
“30분이나 서 있었으면서?”
“어쩐지 지루하더라.”
그녀는 가볍게 웃곤 지루한 남자를 위해 기꺼이 조금 전 습득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아직까진 모성의 누구도 저 별에 발을 들인 사람이 없다고 해요.”
“헤에.”
작게 추임새를 뱉은 남자는 이어 작게 중얼거렸다. 그 혼잣말을 들은 그녀는 사진에서 눈을 떼고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는 사진을, Z-KK101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물었다.
“그쪽, 이름이 뭐예요?”
“다음에 만나게 되면 알려줄게.”
그녀는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야 그의 이름을 알게 된다.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새벽 3시를 넘긴 시점이었다. 누운 채로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다가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갈증이 일어 물이라도 한잔 마시고 다시 누울 생각이었다. 베란다의 문이 열려있었다. 가족 중 누군가가 닫지 않은 채로 들어가 버린 거겠지. 문을 닫기 위해 베란다 앞에 선 루나웨이는 창 너머로 보이는 인영을 눈치챘다. 옆집의 베란다 난간 안쪽에 타카히사가 기대듯 매달려 있었다. 놀란 얼굴로 그녀가 베란다로 나갔을 때 타카히사는 태연하게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난간의 벽이 높아 떨어질 위험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놀란 감정에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안 자고 있었어? 아주머니는?”
“주무시지.”
“내일 학교 가야지.”
“루나도 마찬가지 아냐?”
“나는 자다가 깬 거야.”
덕분에 잠도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그를 혼자 두고 들어가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루나웨이는 타카히사의 곁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주택이 일렬로 배치된 이 복도식의 멘션은 연결된 베란다가 가벽으로 막혀있을 뿐이라 옆으로 붙으면 서로 내민 얼굴 정도는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안 자면 키 안 클지도 몰라.”
“장담하는데 나는 루나보단 클 거야.”
“정말 한마디도 안 지네. 뭐 하고 있었어?”
“달구경.”
타카히사가 팔을 뻗어 하늘을 가리킨다. 보름이 아니었으니 완벽한 원형은 아니었지만, 구름에 가리지 않아 밝게 떠오른 달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꿈속의 여자는 곧 저 달로 향한다. 지구를 지켜보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꿈에서 깨자마자 달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점점 꿈에서 보는 기억의 해상도가 높아져 가다 보니 지구에서 달을 올려다보는 순간이 문득 이상하게 느껴졌다.
“다시 자러 안 갈 거야?”
“타카히사 때문에 깨버렸는걸.”
“내가 사과해야 하는 타이밍?”
“해봐.”
“미안해요, 누나.”
그 천연덕스러움에 루나웨이는 웃어버렸다. 정말 외계인이라니까. 꿈이 이어지는 기분이다. 날은 점점 더워지지만 아직 열대야는 찾아오지 않아 밤바람은 서늘하다. 어둠은 종종 충동을 부추긴다. 어쩐지 부정당하고 싶지 않아 줄곧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낸 것은 분명 밤의 술수였을 거다. 루나웨이는 타카히사를 따라 난간에 팔을 걸치며 입을 연다.
“꿈에서 말이야. 어떤 사람이 여긴 누구의 고향도 아닐 거라고 했어.”
타카히사는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남자에게는 고향이 없다.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도 이미 그 존재는 없었다. 태어난 곳은 있었겠지만 이미 그 별은 멸망했다. 자란 곳을 고향이라고 부르기엔 그의 첫 기억은 난민들을 수용하던 수송선에서 시작한다. 수송선이 도착한 별 또한 지금 와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별의 수만큼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였으니 그의 사연은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다. 다만 그는 생존이라는 당면한 과제를 수행하다 보면 고향이라는 것이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생각 같지는 않았다. 모두가 정착할 곳을 찾아 떠돌고 있다. 일반적으로 다수가 따르는 것을 정답이라고 부르기에 남자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은 바뀌게 되었다. 아무 연줄도 없는 전쟁고아.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고 대단한 에스퍼도 없다. 그가 결국 이 평화롭고 강대한 모성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별들과 함께 사라지기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래엔 생존이야말로 그의 특기가 된 셈이다. 비록 모성에 발을 딛자마자 곧 또다시 먼 은하계로 차출될 처지지만 큰 불만은 없다. 모든 망향자들은 모성이 그들의 새로운 고향이 되길 꿈꾸지만 그는 달랐다. 고향이 없다는 것은 돌아갈 곳이 없다는 곳이다. 없어도 좋다. 똑같은 말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러니까 그는,
계속 떠돌고 있다. 하염없이 어딘가를.
“역시 내려갔어야 하는 거 아냐?”
그는 팔을 내어준 채로 말했다. 소강상태가 된 언쟁을 지금 와서 꺼내는 것엔 큰 의미는 없다. 어차피 이제 남은 사람은 단둘뿐이다. 여자는 남자의 팔에서 주사기를 빼고 엄지로 지그시 바늘 자국을 누르며 대답했다.
“백신을 못 믿어서 그래?”
“그거야 두고 봐야 알겠지.”
“믿어, 그럼.”
“그럼이라니.”
여자의 팔에 난 비슷한 바늘자국을 바라보며 남자가 얕은 한숨을 쉰다. 보기 드물게 불만이 많네, 하고 여자는 웃었다.
“언젠가 네가 그랬잖아.”
“뭐라고?”
“거긴 누구의 고향도 아닐 거라고.”
“그런 말을 했던가.”
“했어.”
혼자 후련하게 잊지마, 하고 여자가 핀잔을 준다. 정말로 기억에 남아있지 않아서 억울해진 남자를 무시한 채로 여자는 엄지에 배어 나온 피를 거즈로 닦았다.
“어쩐지 그 말 때문에 여기에 오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아.”
“동의했으니까?”
“틀렸다고 생각했으니까.”
“뭐야, 그게. 어찌 됐든 내가 네 목숨을 살린 거네.”
“지금 내가 널 살려주지 않았어?”
모성과 그 은하계를 우주의 먼지로 만들어버린 감염병은 결국 이 멀리 떨어진 우주까지 닿았다.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를 잃은 슬픔조차도 결국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살아남아 슬픔이 요람이 되어주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사랑보다는 사명감에 가까운 감정일 것이라고 남자는 짐작한다.
“조금 졸려.”
“고생했어. 자.”
“응… ….”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그는 그녀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잠에 들고, 그는 그녀를 안아 들고 침대로 옮긴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는 알게 된다. 살아남은 것은 또다시 그다.
9년이 흐르는 동안 그 질문을 잊어본 적이 없다.
만들어진 백신은 하나였고, 그것은 사명감이 아니었다.
나는 무엇을 틀렸고, 그렇다면 너는 무슨 마음이었어?
그 답을 찾고 있다.
“좀 더 이야기를 들려줘.”
다시 어린 소년이 된 지금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