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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도시 필트오버와 자운의 극심한 갈등 속에서 자란 두 자매, 이리와 모모하. 마법 공학 기술과 충돌하는 신념 간의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다.

잃어버린 기억과 망가진 마음, 돌아오지 않는 어린 시절의 약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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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방영 | 9화

아케인

Arcane

※애니메이션 「아케인(2021)」의 주요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하도시의 뒷골목에는 항상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은 말보다 생존 법칙을 먼저 배운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서는 자운에서 살아갈 수 없다. 빛이 들지 않는 곳. 지상의 따스한 햇빛 대신 곳곳에서 피워올리는 녹색 연기와 번쩍이는 색색의 불빛들이 더럽고 냄새나는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채운다.

언젠가 높은 곳에 올라가 우리가 사는 구역을 내려다본 적이 있다. 우리는 그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들이었던지라 올라갈 수 있는 곳이라곤 구역에서 가장 높은 첨탑이 전부였다. 제대로 된 계획도 없이 충동적으로 결정된 도전이었다. 어른들 몰래 여자애 둘이서 낑낑대며 가파른 탑을 기어올랐으니, 당연히 몇 번이나 미끄러져 굴러떨어질 뻔했다. 

겨우겨우 꼭대기까지 올라가자 시야가 확 트였다. 우리는 가쁜 숨을 고르지도 않은 채 헉헉대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휘둥그레해진 눈에 어둡고 화려한 지하도시가 가득 담겼다. 화학 물질이 만들어낸 자욱한 스모그가 도시 전체를 휘감고 있는 광경. 엄지손가락만한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 연기 사이로 선명한 색깔의 불빛이 파직파직 소리를 내며 터지고, 거대한 톱니 바퀴가 돌아가고, 증기가 피어오르는 풍경을. 우리는 어린아이다운 천진난만함으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거대한 기계와 지독한 화학 물질, 그리고 결코 걷히지 않는 어스름으로 덮인 곳. 거칠고 끔찍한 강철과 유리의 도시를. 우리는 진절머리 내는 동시에 사랑했다. 


 

* * *


 

팍, 하고 뭔가 터지는 소리에 흠칫 놀란 칸자카 이리가 드디어 눈을 떴다. 어쩐지 몸이 으슬으슬 시리고 추웠다. 손발이 굳어 잘 움직여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여긴 어디지? 방금 그 소리는, 꼭 어디서 들은 적 있는 것 같았는데.’ 

이리는 겨우 정신을 차리며 생각했다. 이리의 몸은 밧줄로 꽁꽁 묶인 채 낡은 의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리는 당황해서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어찌다 단단히 묶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기억은 분명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집 밖을 나선 거였는데. 오늘은 칸자카 이리가 도시에서 가장 명예로운 훈장을 받는 날이었다. 그가 인생을 쏟아부은 에너지 연구는 마침내 필트오버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내일부터는 이리가 바꾼 에너지 체계가 필트오버 의회 건물에 공급되고, 차차 도시 전체가 천재 과학자 칸자카 이리의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 갇혀만 있을 순 없어!’ 

마음을 굳게 먹은 이리는 먼저 터지는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를 찾았다. 소리의 근원지는 폭죽 무더기였다. 불꽃이 튀기는 소리가 날 때마다 폭죽 끝에 매달린 불빛은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초록색, 자주색으로 변하며 빙글빙글 돌아갔다. 이 폭죽 무더기는 어둑어둑한 방 안의 유일한 광원이기도 해서, 불꽃이 색을 바꿀 때마다 실내의 색깔도 다르게 물들어갔다. 

아무래도 이 건물은 이미 오랫동안 방치된 모양이었다. 형형색색의 불빛이 비추는 곳마다 엉망으로 부서진 잔해들이 보였다. 넓은 테이블, 의자, 푹신해 보이는 소파,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난간. 잔뜩 낡고 망가지긴 했지만 구성과 배치만은 그럴듯했다. 아마 생활 공간이었던 게 아닐까? 어쩌면 제법 단란한 사람들의. 

불꽃에 의존해 실내를 둘러보고 있으니 빙글빙글 도는 폭죽에서 서서히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리는 자기도 모르게 짧은 기침을 했다. “콜록.” 그 순간, 불꽃 터지는 소리 외에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하던 방 안에 쿵,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리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거짓말처럼 잠잠해진 방은 다시 우울한 침묵으로 뒤덮였지만, 이리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누군가 있다. 이리가 아닌 또다른 사람이. 

“…저, 저기… 누구야?”

이리는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조금 떨려 나왔지만, 그래도 우습지는 않았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이리는 한 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있는 거 알아! 누구인지 대답해줘. 왜… 왜 날 묶어둔 거야?! 이거 풀어!” 

이리는 힘껏 외치며 발을 굴렀다. 하지만 다리까지 꼼꼼하게 묶인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거 안 풀면 소리지를 거야!” 할 수 있는 건 으름장을 놓는 것뿐이었다. 이리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허세를 부렸다. 

효과가 있었던 건지, 곧이어 한 번 더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물건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육중한 소리였다. 여전히 큰 소리에 익숙해지지 못한 이리는 한 번 더 놀랐다. 이윽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폭죽 불빛이 가려지며 그림자를 만들었다. 사람의 그림자다. 이리는 번쩍 고개를 들어 천장 부근을 바라보았다. 

“거기 누구…….” 

기세 좋게 시작한 물음은 뚝 잘려나갔다. 겨우 형상만 유지하고만 있는 난간에 누군가 걸터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뚝 떨어져 나갈 듯 아슬아슬한 모습이었지만 당사자는 꼭 푹신푹신한 소파에 앉아있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가 발목을 까딱거릴 때마다 양쪽으로 길게 묶어 내린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깡마른 체구에 작은 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리는 그게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모모하?” 

“맞췄어!” 

다리를 정신 사납게 달랑거리던 소녀가 잔뜩 신난 어린아이처럼 외쳤다. 그리고 한 손으로 난간을 짚은 다음 망설임 없이 풀쩍 뛰어내렸다. 겨우 2층이라곤 해도, 제멋대로 지어진 건물의 특성상 난간의 위치는 까마득하게 높았다. 그러나 모모하는 높이 따위 처음부터 신경쓰지 않았다는 듯 가볍게 착지했다. 큰 소리도, 요란한 사고도 없었다. 

“어, 엄청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잖아…! 괜찮아?” 

이리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괜찮아!” 

모모하가 명랑하게 대답했다. 둘 사이에 놓인 폭죽 더미가 아직도 뱅글뱅글 돌아갔다. 오렌지색, 푸른색, 자주색 불빛을 머금은 모모하의 얼굴은 기다리던 파티를 마주한 어린아이처럼 밝고 즐거워 보였다. 

“그래? 그럼 다행이지만…” 

“응!” 

“그럼, 나 이거 좀 풀어 줄 수…….” 

이리가 부탁하려던 순간 갑자기 주변이 새카맣게 어두워졌다. 틱, 하는 소리와 함께 폭죽의 수명이 다 한 것이다. 날카로운 불빛이 단숨에 사라지자 눈 앞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리는 더럭 무서워져서 초조한 목소리로 다시 그 이름을 불렀다. 

“모모하?” 

“응! 나, 여기 있어!” 

그 대답과 동시에 눈앞이 확 밝아졌다. 눈부신 빛에 이리는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이번에 눈앞을 밝힌 빛은 모모하가 든 총구 끝에서 나오고 있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총은 아주 특이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는데, 모모하의 오른쪽 팔에 휘감긴 모습은 꼭 깡마른 소녀가 근사한 기계 팔을 장만한 것 같았다. 묘한 자줏빛 광선이 거친 총신을 감싸고 있었는데, 필트오버에서 수많은 연구를 거듭해 온 칸자카 이리조차 이런 빛은 본 적이 없었다. 

“모모하, 그…” 

“응!” 

“나 이거 좀 풀어줄 수 있을까?” 

“응? 풀어주는 게 좋아?” 

“이렇게 있으니까 조금 불편해서… 무섭기도 하구.”

“뭐어? 무섭다구!?” 

모모하가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모모하의 눈에도 기묘한 자주색 빛이 맴돌고 있었다. 이리는 어쩐지 살짝 겁이 나서, 고개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조, 조금… 여긴 너무 어둡구, 뭐 하는 곳인지도 모르겠어.” 

“무서워할 게 뭐가 있어! 기억 안 나?” 

“…응?” 

“이런, 이런, 이리! 잊어버렸구나!”  

“내가… 내가? 뭘?” 

“전부 다!” 

모모하가 날카롭게 외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마치 자아가 있는 뱀마냥 모모하의 팔을 휘감고 있던 총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찌릿찌릿한 광선을 쏘아냈다. 기묘한 빛깔의 광선은 용수철처럼 튕겨나가며 테이블과 벽, 바닥에 놓여 있던 촛대에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실내는 모독적인 자줏빛으로 가득 찼다. 

“으으…” 

갑작스럽게 주변이 밝아지자, 이리는 잠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모모하는 총구에 후 하고 입김을 불더니 임무를 마친 총의 끝부분에 과장되게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공간을 이질적으로 채웠다. 이어서 모모하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리는 왠지 불안해져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모모하… 저기, 내가…” 

“아! 걱정하지 마, 이리.” 

그러나 모모하의 발랄한 목소리가 이리의 말허리를 뚝 끊어냈다. 이리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모모하는 대화가 아니라 공연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배우는 모모하라 모모하 한 사람. 그리고 관객은 오직 칸자카 이리 뿐인 우습고 끔찍한 일인극을.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어!” 

“뭘…?”    

“잊어버린 것 말이야! 사과하려고 했던 거지?” 

“응? 아… 그런 것도 있지만.” 

“괜찮아! 이리는 잊어도 돼.” 

“나, 나는 잊고 싶었던 게 아니라. 잊으려고 했던 게 아니야.” 

“이리가 잊어도 내가 기억하니까.” 

마지막 대사는 아주 낮고 섬뜩하게 들렸다. 순간 손발이 차가워지는 기분에 이리가 몸을 떨었다. 이 말도 분명 언젠가 들었던 것 같은데. 

“아……!” 

그때 갑자기 이리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어떤 장면들이 내리꽂혔다. 머리가 깨지는 듯한 통증에 이리는 자기도 모르게 몸부림쳤다. 예쁜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마치 누군가 이리의 뇌를 가르고 그 안에 필름 조각을 꽂아넣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장면들 속에서 이리와 모모하는 웃고 있었다. 칸자카 이리와 모모하라 모모하는 절친한 친구였다. 여기까지는 이리도 아는 내용이다. 비슷한 때에 비슷한 곳에서 태어난데다가,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는 걸 좋아하는 성격까지도 꼭 닮은 두 사람은 지하도시의 사람들로부터 자운의 골칫덩이이자 사고뭉치 취급을 받았다.

자운! 

이리의 생각이 거기까지 뻗어나가자, 지금껏 뇌 한 구석에 처박혀 있었던 기억들이 와르르 터져나왔다. 독한 화학 물질이 만들어낸 녹색 연기. 짙은 스모그가 휘감고 있던 도시. 첨탑을 오르느라 몇 번이나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던 기억. 거기서 내려다봤던 지하도시의 광경. 

“나, 내, 내가. 내가 뭔가를…….” 

내가 뭔가를 잊고 있었어! 

이리는 그 극명한 사실에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통각을 느꼈다. 벼락이 내리치는 것 같은 충격이 연이어 정수리부터 발끝을 가로질렀다. 

“응.”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모하가 노랫소리처럼 답했다. 모모하는 이제 테이블 위에 놓인 접시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엉망으로 깨지고 부서진 접시 위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하나씩 올려져 있었다. 찢어진 책. 모형 총. 이가 나간 플라스크. 낡아빠진 운동화와 찢어진 라이더 자켓. 바퀴가 나간 스케이트보드와 작은 바이크 모형 장난감. 지하도시의 어린아이들이나 소중히 할 것 같은 잡동사니들을 모모하는 아주 귀한 요리를 다루는 것처럼 접시에 하나하나 올려놓고 단장하고 있었다. 

“괜찮아.” 

이번 대답은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모모하는 아주 조용하고 담담하게 이리를 위로했다. 이리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모모하를 바라보았다.

“내… 내가 어디까지 잊은 거야?” 

이리는 모모하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어릴 때 친했지만 지금은 만나지 못한 친구’가 다였다. 그는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반동인지 일상적인 기억들을 종종 깜빡하곤 했다. 필트오버 사람들은 ‘천재 과학자에게도 귀여운 부분이 있다’며 이런 건망증을 흠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칸자카 이리가 아는 자신은 필트오버 소속의 연구자였다. 기억 속에서 자신은 고향에서 필트오버로 이주해 훌륭한 마법공학 교수님의 후원을 받으며 아카데미에 다니고, 졸업 후 에너지에 관한 독자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결과를 인정받으려는 참이었는데.

“이리 잘못이 아니야.” 

모모하는 여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 그는 저 끝의 접시까지 꼼꼼히 살핀 다음, 테이블 모서리에 걸터앉아 의자에 꽁꽁 묶인 이리의 머리카락 끝을 쓰다듬었다. 

“이리는 고통스러워 할 필요 없어.” 

“내가 모르고 있는 걸 알려줘.” 

“왜?” 

“다… 당연한 거잖아. 내가 잊었으니까…” 

이리는 어쩐지 죄를 지은 사람같은 기분이 되어 어물어물 대답했다. 모모하는 정말로 이해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로 이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기억하지 않아도 되니까 잊은 거잖아?” 

“그런 게 아니야…!” 

“지금까지 살면서 힘들었어?” 

“그, 그건… 몰랐으니까…….” 

“나도 이리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렸다. 이리는 스스로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잊어버렸으니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 게 당연하고, 지금까지 필트오버에서 살아가며 늘 눈부신 영광의 길만 밟았다. 그런데 모모하에게는 ‘잘 지냈어, 그게 당연하잖아’ 라는 말을 하기가 왠지 힘들었다. 그건 기억의 바깥쪽으로 밀려난 모모하에게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 우선 이거 풀어줘. 그 다음에 천천히 얘기하면 안돼?” 

“음, 아직 안돼!”

“왜…” 

“이제 곧 시작될 거거든.” 

모모하는 뜻 모를 소리를 하며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이리는 자신이 기억하는 모모하와 지금의 모모하가 가진 괴리에 혼란스러워졌다. 모모하가 왜 이렇게 변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지하도시의 환경을 생각하면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지나치게 많았다. 아름답고 번영한 낮의 도시 필트오버의 시민인 이리는 자운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수도 없이 가지고 있었다. 세피아 톤으로 물들어 머릿속을 배회하는 추억의 광경은 아직 이리에게 와닿지 않았다. 

“…뭐가 시작되는데?” 

“사람들은 이리를 이용하고 싶어해.” 

“응?” 

“오늘 필트오버에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이리의 연구가 발표될 거야.” 

“그, 그럴 리가… 그 연구는 내 거야. 훈장도 내가 받기로 되어 있고…!” 

“연구자 이름 같은 거 조금만 바꾸면 되잖아? 기억을 지우는 것보다 쉬워.”

“…….” 

신랄한 대답에 이리는 대답할 말을 잃었다. 모모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밝은 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 나면 다시 이리의 기억을 날려서 어딘가에 던져버리겠지. 어쩌면 처박아두고 다시는 꺼내지 않을지도 모르고… 창고에 넣어둔 다음 필요할 때만 꺼내서 볼지도 몰라!” 

“교수님은… 나를 후원해 주시겠다고 했어, 절대 그런 분이…….”  

“나는 이리가 나를 잊고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아.” 

“…….” 

“그건 이리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잖아. 이리는 늘 말했어. ‘언젠가 햇빛 아래에서 살고 싶어’. ‘그러면 정말 기분 좋을 것 같아’. 나는 기억해. 그러니까 필트오버에서 이리를 데려갈 때도 잡지 않은 거야. 이리도 가고 싶어했으니까.”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였다. 이리의 기억은 애매한 곳에서 시작하고, 애매한 곳에서 끊겨버린다. 

“나, 나는… 전혀 기억을 못 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괜찮아. 이리가 원하는 게 내가 원하는 거야.” 

“…….” 

“아! 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것도 있어.” 

“……뭔데?”

“희생이 의미없어지는 것.” 

모모하가 차갑게 말했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말투와도 달랐다.  

어느새 모모하는 풀쩍 뛰어올라 다시 난간에 달랑 걸터앉아 있었다. 그의 몸에는 탄창이, 팔에는 총기가 휘감겨 있었다. 멀리서 본 모모하는 마치 금속으로 이루어진 인간 총기 같았다. 자줏빛 광선을 받은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나 그 실체는 그저 깡마른 소녀일 뿐이어서, 가느다란 그림자는 가냘프게 흔들거리기만 했다. 

“내가 이리를 보내준 건 희생이야.” 

“…….” 

“피와 살을 가르는 것만큼 아팠어.” 

“모모하…….”

“그러니까 의미없게 두지 않아.” 

결단코 너를 꺾이게 두지 않아. 누군가 너를 더럽히게 두지 않을 것이다. 

모모하는 짧은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기둥에 머리를 기댔다. 그 옆으로는 거대한 병기가 쩔걱거리며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대포 위에 달린 붉은 등이 불안하게 깜빡거렸다. 이리는 뭔가 눈치채고 다급하게 외쳤다. 

“모모하!”

“응.” 

“그러지 마.” 

“걱정할 것 없어.” 

“하지 마! 더 나빠질 거야!” 

“이미 충분히 나빴어.” 

“…….” 

“그러니까 더 나빠진다고 해도 예전만큼은 아닐 거야.” 

모모하의 목소리는 속삭임처럼 들렸다. 말로는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단 생각에 이리는 어떻게든 밧줄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썼다.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다. 어떻게도 할 수가 없다. 다가오는 불행을, 끔찍한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모모하라 모모하가 그랬던 것처럼. 

문득 칸자가 이리는 자운의 뒷골목에서 살아가던 밝은 소녀가 온몸을 총기로 두르게 된 과정을 상상했다. 그러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불운한 빛을 두른 모모하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괜찮아, 이리.” 

“…….” 

“전부 잊게 될 거야.” 

삑, 삑, 삑. 

깜빡거리던 붉은 등이 어느 순간 멈추었다. 

 

 

* * *


 

- 진짜 높다! 역시 올라와보길 잘했어!

- 너, 너, 너무 높아서… 떨어질 거 같아…!

- 이리는 무서워!? 

- 아, 아니…! 엄청 신나…! 

- 나도 그래! 

모모하가 한바탕 웃었다. 꼭 유리구슬이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얼떨떨한 표정이던 이리도 모모하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고 난 후, 이리는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기계와 지독한 화학 물질, 그리고 결코 걷히지 않는 어스름으로 덮인 곳. 거칠고 끔찍한 강철과 유리의 도시. 

- 여, 여기보다 더 높은 곳은… 어떤 곳일까? 

- 지상 말이야? 가 본 애들이 그러는데, 거긴 매일 햇빛이 든대! 

- 해, 햇빛이?!

- 응! 매일매일 햇빛이 들고, 하늘은 파랗고, 맑은 날이면 구름이 흘러가는 걸 볼 수 있대!

- 우, 우와아. 

- 아, 그리고 안개도 없고!

- 우, 우와아아…! 

 가본 적 없는 곳을 꼭 상상의 나라마냥 떠들던 모모하가 불쑥 물었다. 

 - 이리는 가보고 싶어? 

- 으, 응? 

- 그런 곳에서 살면 좋을 것 같아? 

- 나, 나는… 해, 햇빛 아래에서 살면… 자, 잘 모르겠어. 

- 그래? 여기가 더 좋아? 

- 그, 그치만…… 

꼬마 이리는 꼭 햇볕이 살에 닿는 순간을 상상해보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 정말 기분이 좋겠지……. 

그런 곳에서 산다면. 

매일 햇빛 아래에서 지낼 수 있다면 말이야. 

지하도시 태생의 꼬맹이들은 매캐한 연기와 깊은 어둠에 익숙해졌고, 스스로 태어난 이 도시를 사랑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다. 그 애정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하도시에서 살아가는 스스로를 비관하지 않았다. 이곳 자운에는 나름대로의 활기가 넘쳤고, 부족한 만큼 서로를 끈끈하게 아끼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하수구에서 흐르는 녹색 물을 마시며 살아간 아이들이 햇빛을 동경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 이리! 

- 으, 응?!

- 언젠가 위로 올라가 보자!

- 위, 위로…? 

- 응! 그래서 온 몸에 내리쬐는 햇빛을 받는 거야. 

모모하는 벌떡 일어나서 팔을 양쪽으로 쫙 폈다. 짙은 연기가 흐려둔 빛 한 줄기가 모모하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모모하는 씩 웃으며 이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땐 내가 이리를 데려가 줄게! 

햇빛 한 점 없었지만 모모하의 눈은 어둠과 안개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리는 그 눈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응! 

32_아케인

컨텐츠 정보

​출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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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하
Momoha
​생잭, 홍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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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I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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