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오자 거리 곳곳에 걸린 등불이 환하게 길을 밝혔다. 이런 늦은 시간까지 마을이 시끌벅적하게 붐비는 것도 축제 때나 있는 일이다. 일찍부터 상점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은 등불이 하나하나 켜지면서 어둠을 몰아내는 광경을 애틋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가 대부분이었지만, 친구들이 다같이 놀러 나온 경우도 많았다.
조명 설치하는 것도 한 세월 걸렸는데 말이지. 그래도 내가 도와서 금방 끝나지 않았어? 멜롯이 가벼운 푸념을 늘어놓자 노나가 웃으면서 응수했다. 최근 들어 노나는 주력을 다루는 솜씨가 점점 늘어 이제는 조명을 가로등이나 건물 기둥에 매다는 것도 곧잘 해냈다. 그래, 네 덕에 일은 줄었네. 내년 축제는 노나 혼자 해도 되겠어. 아예 물려주려고? 인정받은 건가, 아니면 일을 하기 싫은 건가 고민하던 차에 크루쉬가 짧게 말했다. 떠넘기려는 거지. 뭐 나쁠 거 있나, 멜롯은 뻔뻔하게 웃었다. 자네도 참 여전해. 헤임달이 편 부채 뒤로 호호,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제 또래보다도 훨씬 오래 산 노인처럼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때, 그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낙엽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 무언가를 굽고 튀기는 소리와 다트따위를 던지고 환호하는 소리 사이로, 선명하게.
맑은 종소리다. 그 옆으로 시냇물이 흐를 때 같은 작은 물소리가 함께 들렸다. 크루쉬는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전에도 이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소리에 집중하자 주변의 잡음들은 지우개로 눌러 지운 것마냥 한없이 번지다 이내 멀어졌다.
그날은 지금보다 훨씬 더 조용했다. 몇 년은 더 지난 이야기다.
* * *
마을에서 윤리위원회의 호출을 받는 경우는 열이면 열, 좋은 일은 아니었다. 네 사람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위원회에 불린 사실 자체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얼마 전에 그들이 나무의 결을 더듬듯 기억을 헤집어 어떤 결락을 발견한 까닭이다. 당장에 유진이 크루쉬에게 함께 당번 일을 맡자고 제안했지만 네 사람 모두 유진에 대한 기억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또한 유고스에 관한 일에 더해 다른 마을로 떠난 일레인까지 소식이 묘연해지자 멜롯도 더 이상 그 애는 처음부터 그럴 것 같았다는 말로 문제를 덮지 않게 됐다. 어쩌면 노나가 팔정표식을 넘어갔다 온 걸 들킨 건지도 모른다. 노나는 상냥했지만 무모한 구석이 있었다. 짚이는 곳이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네 명 모두 예상했던 불안이나 의문을 안은 채 대기실로 향했다. 차라리 그들을 더 놀라게 한 건 헤임달의 할아버지가 윤리위원회의 의장이라는 것이었다. 나도 몰랐다네. 헤임달이 태연하게 답한 탓에 멜롯이 잠깐 그를 의심했지만 무게 있는 불신은 아니었다.
크루쉬는 그들 중 가장 처음으로 호명되었다. 또 유일하게 의장이 독대를 요청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알겠어요. 크루쉬가 긴 복도를 걷는 동안 안내인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좋은 분이시니 긴장할 필요 없어요. 하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다면 이런 식으로 우리를 부르지 않았겠지, 크루쉬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문턱을 넘었다.
긴 하늘색 머리카락을 아래로 늘어뜨린 남자는 자신을 오베론이라고 소개했다. 눈가에 주름 하나 없는 그의 모습은 도저히 손자를 둔 중년의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훨씬 더 젊게 보였다. 크루쉬는 위화감을 느끼면서 의자에 앉았다.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헤임달의 조부님이시라고."
"오베론이라고 합니다."
그는 막 촛농을 떨어뜨린 촛대를 옆으로 치우고는 크루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의 평화로운 마을을 일구어낸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면서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창에 걸린 종이 흔들렸다.
바로 그 설명을 위해 오베론은 공격 제어와 괴사기구에 통제되지 않았던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주력이 누출되어 주변에 이상 현상을 일으켰던 사람들에 대해 말해주었다. 굳이 되묻지 않아도 크루쉬는 자신들이 잊어버린 오랜 친구가 이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았다.
더불어 자신이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사실 역시도. 교육위원회는 그들이 어떤 일을 겪었고 무엇을 알게 된 건지 이미 전부 알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는 예전처럼 기억을 빼앗기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처분당할지도 모른다. 크루쉬는 현재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머리를 굴리면서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돌아온 말은 뜻밖의 제안이었다.
"전 당신에게 제 다음 의장 자리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제게요?"
그는 몇 가지 설명을 곁들였다. 몇 번이고 내본 요리를 건네듯 자연스러웠기에, 정작 이런 제안을 한 게 처음이라는 말에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는 그 모든 일이 있은 뒤에 크루쉬가 분노했을지라도 결국은 스스로의 감정을 이겨냈다는 사실을 높게 평가했다. 그런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적격이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의장이 된다면 기억도 돌려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당연한 인과를 설명하듯 말했지만 크루쉬에게는 그의 말이 어떤 거래처럼 들렸다.
"아뇨. 받아들이지 않겠어요."
"서둘러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만. 이유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크루쉬가 그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람의 얼굴은 커녕 이름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그동안 다함께 그의 행적을 알아내기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녀도 봤지만 소득이라고는 하나도 얻지 못했다. 크루쉬는 유진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사라진 그가 자신과 꽤나 가까운 사이였으리라는 사실을 간단히 유추했다. 기억 역시 그 자신의 소유다. 타인의 마음대로 잃어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크루쉬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고자 했다.
「누군가가 나를 땅에 묻고 묘비의 글자를 깎은 거야.」
「어째서…….」
「거짓말은 안 했어. 그런 약속이니까.」
하지만 그가 누구던가. 크루쉬 벤, 마을 서쪽의 유서 깊은 집안의 자식은 제 마음이 저울 위로 올라가는 순간에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는 꼿꼿이 서서 오베론과 눈을 마주치고는 말했다.
"공정하지 않으니까요."
인권이 생기는 나이는 열일곱. 자신에게는 아직 한 인간으로서 인정받을 권리조차 생겨나지 않았다. 그렇게 부정고양이를 풀어 사람을 물어 가고 기억을 지우는 세상에서 오직 기억 하나를 되찾겠다고 침묵을 지키고 불쾌한 가면을 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오베론의 뒤로 활짝 열린 창밖에 달이 큼지막하게 떠있었다. 흰 빛은 방을 밝히다 못해 창을 등지고 앉은 오베론의 모습을 더욱 어둡게 보이게 했다. 이렇게 밝은 밤에는 달빛에도 눈이 멀 수 있으니까, 똑바로 보면 안 돼. 그러면 별이 제대로 보이지 않거든. 누군가가 해준 말이다. 이제는 떠올릴 수 없다.
크루쉬는 걸음을 돌려 복도를 거꾸로 걸었다. 등 뒤로 차를 따르는 소리와 작은 종소리가 함께 울렸다.
* * *
"크루쉬?"
"…아."
호객 행위를 위해 점포의 천막 끝에 매달아둔 종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밤을 오래 버티기 위해 차가운 차를 주문한 사람들은 점원이 잔에 음료를 따라주는 걸 오매불망 기다리며 서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을 지나쳐 걸었다.
전혀 다른 풍경인데, 왜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난 걸까. 조명에 별이 가려진 하늘 아래서 크루쉬가 시선을 옮겼다. 노나는 왠지 침울해 보였지만, 그게 자신이 본의 아니게 그의 말을 무시해서는 아닌 것 같았다.
"미안. 무슨 얘기 하고 있었지?"
"나, 여기 오다가 일레인이랑 유고스를 본 것 같아."
"그 둘을?"
크루쉬는 고개를 들어 헤임달과 멜롯의 안색을 살폈다. 헤임달은 언제나처럼 옅게 웃고 있었고, 멜롯은 딱 봐도 회의적인 얼굴이었다.
"하하…. 이제 와서는 나도 일레인 얼굴이 흐릿한데, 네가 무슨 수로 알아봐."
"사람이 많으니 착각할 만도 하지. 유고스가 떠난 건 오래 전의 일이라네."
"그렇지만…."
크루쉬 역시 두 사람과 의견이 같았지만, 이대로 노나를 풀 죽은 채로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주어진 공통된 슬픔은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조차 몰라 제대로 추억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감정이 어두운 골목 사이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만들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크루쉬는 노나의 손을 잡고 그를 축제 한복판으로 이끌었다.
"돌아다니다 보면 찾을지도 모르지. 이런 구석에만 서있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사람도 만나지 못할 거야."
노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다가, 금세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 거리를 걷던 멜롯은 마을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있는 그의 연인, 아마레와 마주치고는 살가운 인사를 나누었고, 헤임달은 노나와 크루쉬에게 이끌려 신기한 물건을 잔뜩 늘어놓은 가게 앞에서 사람들이 직접 만든 공예품을 구경했다.
이따금 노나가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을 바라보면서 저쪽 좀 보라고 하는 일이 있었다. 그마저도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축제란 늘 그런 법이다. 규칙적으로 배열된 등불, 흥에 취해 들뜬 사람들,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그해의 불꽃놀이. 모든 일은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비단 우리만의 일은 아니다.
마을 중심에서 연기 한 줄기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