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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라이브를 이어가는 별, 회사의 스케줄에 몸이 남아나질 않는 소영, 정보요원으로서 사람들을 속이며 살아가는 헨드릭, 남들과는 조금 다른 인생을 걷고 있는 테드. 각자의 세계,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네 사람. 그들은 언제나 기묘한 꿈을 꾼다. 꿈과 함께 찾아오는 건 낯선 이의 방문. 있잖아, 문을 두드리고 있는 너는 누구야? 나는 누구지? 그리고, 우리는 누구인가? 스파이더맨의 멀티버스 세계에서 그들은 서로를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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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 140분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Spider-Man: Across the Spider-Verse

※CoC 시나리오 「AKH」의 탐사자들이 등장합니다. 

※직접적인 스포일러는 없지만 분위기 스포일러 등에 주의해 주세요. 

※영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2023)」의 주요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S#■

만약에 이 모든 일이 정해져 있다면 어떻게 할래? 

그러니까 인생을 시작할 때부터, 네가 너 자신이라는 이유로 바꿀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다면 말이야.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떤 순간은 바꿀 수 없고, 고통은 고통이어야 하고, 끔찍한 일을 지워 버리면 나 자신이 사라지게 된다면?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그것 때문에 후회하고,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밤을 보내는 모든 일들이 정해져 있다고 치자고.  

신에게 아무리 기도해도 세계는 나를 바라보며 ‘끔찍한 일이구나, 하지만 견뎌야 해’ 라고 자비롭게 미소짓기만 하는 거지. 

만약 우리 인생이 무언가에 바쳐지기 위해 존재하고, 그게 당연한 섭리라면. 

너는 어떻게 하겠어? 

 

S#4 

한별의 하루 일과는 대체로 작업실에서 시작하고 작업실에서 끝난다. 아침에는 아침밥, 점심에는 점심밥, 저녁에는 저녁밥을 먹기 위해 사는 이 소녀는 철저하게 식욕에 근거해 그럭저럭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눈을 뜨면 햇반을 뜯어서 돌려 먹고, 점심에는 돈까스를 시켜 먹고, 저녁에는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먹고 싶은 건 매일매일 새로 생기니 인생엔 별 다른 고민이 없다. 마음의 방향을 따라가는 일은 그에겐 전혀 어렵지 않았다. 

주변인들은 별의 이 단순무식한 패턴을 다소 신기해했다. 별이 자주 만나는 사람의 80%는 대체로 늦은 아침에 자고 새벽에 일어나, 1년 365일 다크서클을 달고 살았다. 심지어는 고칠 생각도 없었다. 원래 비슷하게 생활을 망치는 사람들이 모이면 개선이 없는 법. 별은 남들을 고치기보다는 혼자 밥을 먹고 길을 달리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세 끼 밥 잘 먹고 졸릴 때 쿨쿨 잘 자는 별도 생활 패턴을 완전히 박살내는 때가 있었으니. 별과 주변인들은 이 시기를 ‘벼락 맞은 시즌’이라고 불렀다. 이 시즌의 별은 말 그대로 벼락을 맞은 것마냥 작업실에 틀어박혀 노트 찍는 데에만 집중했다. 짧으면 이틀, 심하면 일주일동안 잠도 제대로 안 자고 스위치가 들어온 것처럼 작업에 매진하다가 어느 순간 플러그가 꽂힌 것처럼 픽 쓰러져 잤다. 그렇게 한 번 잠들면 이틀은 깨어나지 않았다. 끌어다 쓴 체력을 다시 채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번이 바로 그런 시기였다. 정확히는 ‘벼락 맞은 시즌’이 끝난 직후였다. 별은 닷새동안 잠도 안 자고 만든 곡을 저장한 뒤 씻지도 않고 매트리스에 엎어졌다. 졸리다는 감각도 없이 기절하듯 잠에 빠진 별은 꿈을 하나 꾸었다. 

꿈 속에서 그는 제복을 입고 단체생활을 하는 조직의 일원이었다. 아마 특수부대 내지는 군인인 것 같았다. 꿈이 늘 그렇듯 상황설정은 불확실하고 앞뒤 기억은 애매했다. 그럼에도 모든 게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몇 년간 이런 생활을 해왔고 그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일이 끝나고 나면 다같이 모여 밥을 먹고 훈련을 했다. 가끔은 근처 호프집에 들러 잔을 기울이고 다트를 던졌다. 별은 그 안에 자연스럽게 끼어 맥주 대신 콜라를 홀짝이고 있었다.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지내면 좋겠다고 무심결에 생각할 정도로. 

흥청망청 술을 마신 어른들 사이에서 마음껏 웃고 한참을 떠들던 별은 기숙사로 돌아왔다. 씻고 뽀송뽀송해진 몸을 침대에 던지자 기분 좋은 나른함이 밀려왔다. 이대로 푹신푹신한 침구에 찰싹 눌러붙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게으른 욕망에 저항할 이유도 없었으므로 별은 한참을 뒹굴거렸다. 그런데 어쩐지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움직임 뿐만 아니라 생각도 점점 더 느려졌다. 마치 의식과 육체에 동시에 족쇄를 매단 다음 아래로 던져버린 것 같았다.  

몸이 무거워지자 꿈 속의 별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몸과 머리가 의식을 벗어나 마음대로 움직여댔다. 그때, 의식 한 구석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똑. 

‘몸이 너무 무거워.’ 

별은 그 소리를 들었지만 도무지 팔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정신과 몸이 일치되지 않아서 어지러웠다. 하지만 노크 소리는 굴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처음에는 가볍게. 

똑, 똑, 똑, 

이후로는 다급하게.

똑, 똑, 똑, 똑. 

나중엔 문을 부술 것 같은 세기로.

똑, 똑, 똑, 똑, 똑. 

결국 별도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사람을 불러 대면 아무리 피곤해도 잠에 들 수가 없다. 별은 무거운 몸을 뒤집었다. 아래로 끌어내려지던 사지를 어떻게든 들어올려 문을 열려는 찰나, 눈이 번쩍 떠졌다. 

“아!” 

꿈이었잖아! 멍했던 정신이 돌아오며 시야도 차차 선명해졌다.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아 팔다리가 욱신거렸다. 별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손가락을 움직여 시간을 확인했다. 핸드폰 액정에 숫자 네 개가 반짝거렸다. 새벽이었다. 

‘앞으로 이틀은 죽은 듯이 잠만 자려고 했는데! 누가 꿈 속에까지 찾아와서 날 방해한 거야?’

짧은 짜증은 금방 휘발되었다. 그건 한별의 장점이었다. 쉽게 기뻐하고, 쉽게 잊는다. 성격적 장점을 십분 활용한 별은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잠들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 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똑,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더 거칠어지기 전에, 별은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꿈이 아니었다. 정말 현실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였다!

‘대체 누구길래 날 이렇게 열심히 깨우는 거지!?’

이제 짜증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별은 원체  긍정적인 감정으로의 변환이 빠른 편이라 두려움이 흥분이 되고 공포가 즐거움이 되는 경우가 잦았다. 이번에도 기분 나쁜 방문객은 순식간에 깜짝 게스트로 탈바꿈했다. 폴짝거리며 현관문 앞까지 간 별은 문고리를 잡고 생각했다.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했으면 내가 기절할 만큼 놀라게 해 줘!’ 

그리고 마치 막이 걷히듯 문이 열렸다. 

 

S#■

나? 나라면… 비관하겠지. 먼저 인생이 왜 이따위냐고 말할 거야. 그리고 나한테 이런 운명을 준 신을 하루 종일 욕할래. 그러고 나서는 정해진 일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빠져나갈 궁리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겠지. 

난 나란 놈을 잘 알아. 아마 어떤 비겁한 방법이라도 찾아내서, 결국 해내고 말 거야. 설령 그게 모두의 비난을 받고, 끔찍한 일을 불러일으키더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내 운명을 뒤바꿀 수 있다면 망설임 끝에 난 그 길을 선택할 거야. 

하하… 참 우습고 한심한 놈이지. 나도 알아. 

비난은 달게 받을게. 일부러 돌려 말할 필요 없어. 아니, 네가 그런 성격이 아니란 건 내가 제일 잘 알지만… 잠깐. 취소! 조금만 더 상냥하게 말해줄래?! 

 

S#3

“오늘 철야했어?” 

“말 시키지 마.” 

“살벌하네…! 알았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자.” 

문소영이 퀭한 얼굴로 집에 들어왔다. 이럴 때의 소영은 가능하면 건드리지 않는 쪽이 좋다. 문천영은 오랜 경험과 선천적인 직감으로 문소영을 다루는 방법을 꿰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이면 문소영은 밥도 안 먹고 죽은 듯이 잠만 자다가, 밥을 먹기도 애매한 새벽에 깨서 아무거나 주워 먹고 다시 잠들곤 했다. ‘뭐라도 먹을 걸 준비해 놔야겠다.’ 천영은 소영이 던져 놓은 자켓을 걸어두며 생각했다. 

고작 몇 분 차이로 세상에 나왔을 뿐인데 문소영과 문천영의 성격은 하늘과 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소영과 다르게 천영은 대체로 모든 일에 너그럽고 배포가 컸다. 소영이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동안 천영은 새 친구를 사귀고 공을 튀기면서 놀았다. 자연스레 거리가 멀어질 만한 성장 환경이었지만, 둘의 사이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늘 한결같았다. 

얼굴만 그럴듯하게 닮고, 알맹이는 180도 다른 쌍둥이. 이 사실은 종종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소영과 천영이 어떻게 다른지, 그런데도 어쩌면 이렇게 옛날부터 사이가 좋은지를 신기해하며 떠들었다. 소영은 누군가 자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천영은 이런 부분에서도 관대했다. 소영이 차가운 말로 분위기를 망칠 때 천영은 애써 웃으며 분위기를 무마하곤 했다.  

소영은 천영처럼 될 수도 없었고 되고 싶지도 않았기에 자신만의 방법을 터득했다. 필요없는 건 대충 넘겨 버리고, 대부분의 일에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는 것. 소영은 이게 꽤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천영은 어째 더 난처해지기만 한 모양이었다. 구국의 영웅 문천영은 분기마다 꼭 한 번씩은 쌍둥이 누나의 인간관계를 구하기 위해서 뛰어다녔다. 한참동안 양측 사람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물심양면으로 달래고 나면 겨우겨우 분쟁이 잦아들었다. 

세계통합보다 위대한 ‘문소영 인간관계 봉합’에 성공한 문천영은 숨을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누나, 남들한테 조금만 더 친절하게 대해주면 안돼? 

“근데 너 왜 집에 있어?” 

죽은 눈으로 방에 들어가려던 소영이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이건 ‘너 혹시 무슨 사고라도 쳤냐?’는 뜻이었다. 천영은 안 그래도 피곤한 누나가 끔찍하고 도움도 안 되는 상상을 하기 전에 황급히 양손을 내저었다.  

“아니, 별 일 없어. 포상 휴가야. 저번에 말하지 않았어?” 

“그랬었나…?” 

“잊어버렸구만.” 

“몰라, 내가 너보다 바빠.” 

“말은 참….”

다른 사람에게 조금만 더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 그거야말로 소영이 가장 어려워하는 일이었다. 타고난 머리는 소영이 좀 더 쉽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동시에 천영을 고생시키는 주범이기도 했다. 지나치게 차가운 두뇌와 뛰어난 지능은 불합리하고 감정적인 일들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렇다고 화가 없는 것도 아니라 문제였다. 다행인 점은 문천영이 뒤치다꺼리를 귀찮아하지 않는 성미란 거였다. 그의 관대한 성품은 주변인들 뿐만 아니라 소영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언제나. 

“그럼 나갈 거야?”

“어. 먹을 것 좀 해놓고 나갈 테니까 이따 깨면 먹어.” 

“식탁에 둬…….” 

그 말을 끝으로 소영은 방에 들어가서 기절했다. 잠들기 직전 천영이 뭐라고 말을 건 것 같았지만 듣지 못했다.   

잠에 빠져든 소영은 꿈을 꿨다. 꿈 속에서 천영은 이 세상에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이미 한참 전에 죽었다. 꿈답게 소영은 이 사실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었는데, 종종 문천영의 결핍을 받아들인 자신에게 큰 충격을 느꼈다. 문천영의 결핍이 자신을 구성하는, 일종의 정체성이 되었단 걸 자각한 순간은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그 애가 없는 세상은 뭔가 이상했다. 가끔 그는 문천영을 되돌려 놓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비겁한 방법이라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직 죽은 자만 모독하지 않는 방식으로. 

꿈 속의 소영은 대부분의 순간에 일했고, 가끔 사교 활동을 하러 나갔고, 자주 기숙사에서 곯아떨어졌다. 수면은 거의 기절처럼 이루어졌다. 문천영이 봤다면 꽤 많이 달라졌다고 감탄했을 만한 장면을 많이 만들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허무감도 느꼈다. 애초에 그는 쉽게 변하는 인간이 아니다. 매트리스 위에 누운 소영은 혹사에 대한 보상으로 무의식 입장 특급 티켓을 얻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귀를 찢는 듯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그 커다란 소리는 순간적으로 공간을 찢으며 현실의 문소영에게까지 닿았다. 소영이 눈을 번쩍 떴다. 시간은 어슴푸레한 새벽이었다. 소리는 여전히 공간을 맴돌고 있었다. 수면을 방해받은 직장인은 인상을 잔뜩 쓴 채로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아무래도 이 소리는 창문 밖에서 들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뭐야?” 

비척비척 창문 앞에 선 소영은 짜증과 의문이 뒤섞인 목소리를 뱉었다. 커튼이 쳐진 창문 너머로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 보였다. 분명 문천영의 실루엣은 아니다. 대체 누가, 이 시간에, 남의 잠을 방해하는 거지? 

대체 누가? 

문소영은 커튼을 붙잡은 채로,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당신, 누구야?” 

 

S#■

내가 누군지 아는 게 제일 어려운 건 같아. 

거창하지만 무엇이 나를 규정하는지 알지 못하면 나를 정의내릴 수도 없단 말이지. 

나는 한때 내가 나만으로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부끄럽지만,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거든. 굳이 누구의 가족, 누구의 친구, 이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나는 나. 내 이름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라고 말야. 

하지만 아니더라고. 내가 겪은 사건과 내가 만난 사람들을 떼어놓고서 나라는 사람을 말할 수는 없는 거였어. 죽도록 부끄러운 실수도 다시는 저지르고 싶지 않은 과오도. 그런 걸 말끔하게 지워버리면 그건 또 나라고 할 수 없는 거야. 

정해진 고통을 전부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야.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고, 뭘 하고 싶은지를 깨달아야 한단 거지. 그러고 나면 마음은 알아서 움직여. 마음의 방향대로만 따라가면 돼. 

… 근데 이렇게 계속 듣고만 있을 거야? 나도 이제 내 이야기만 하면 좀 부끄럽다고? 난 너한테 고해성사를 하려고 온 게 아니야. 뭐 굳이 말하자면 너한테 질문을 하러 온 거지. 

넌 너를 뭐라고 말하고 싶어? 

넌 어떤 사람이야? 

지금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뭐야? 

 

S#2

“일이 늦게 끝났나 보네.” 

“…아, 와 있었어?” 

집에 돌아오자 마리아가 와 있었다. 헨드릭은 순간적으로 ‘마리가 여기 왜 있지?’ 라고 생각했다가, ‘아, 맞다. 서류 확인.’ 하고 깨달았다. 불성실한 남편 헨드릭 모건은 마리아가 앉아 있는 테이블 근처를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역시나 테이블 위에는 갈색 서류 봉튜가 올려져 있었다. 

헨드릭 모건과 마리아 모건은 이혼 절차를 밟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교회에서 처음 만났는데, 사실 헨드릭은 예배를 드리러 간 게 아니라 지역사회 수뇌부의 비리를 조사하러 간 거였다. 잠입이 길어지면서 그들이 얼굴을 보는 날들도 많아졌다. 마리아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늘어놓기를 좋아했고 헨드릭은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내는 데에 소질이 있었다. 순진한 마리아는 헨드릭의 단정한 미소나 금빛 머리카락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처음 마리아가 데이트 신청을 한 날, 헨드릭은 이렇게 생각했다. ‘꽤 쓸모 있는 여자 같은데. 일단 만나 볼까. 손해 볼 것 없지.’ 

헨드릭 모건이 마리아 휠의 다정한 성격이나 인내심을 마음껏 이용해 먹었다는 데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 자신에게 물어도 선뜻 인정할 수밖에 없는 죄목이었다. 헨드릭은 직업을 핑계로 긴밀한 관계를 맺는 일을 기피했다. 그의 결벽적인 태도는 남편으로선 0점이었지만 CIA 요원으로서는 100점이었다. 그리고 헨드릭 모건이 스스로를 남편과 정보부 요원 중 무엇으로 규정하느냐 하면… 당연히 후자다. 

“여기. 서류 가져왔어.” 

“아… 변호사 일처리가 빠르네.” 

“당신이 이 일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고?” 

“이런, 마리… 뭐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해.” 

마리아의 가시 돋힌 물음에 헨드릭이 난처한 척 답했다. 그렇게 수도 없이 실망했는데도 아직 선량함을 잃지 않은 마리아는 그 대답에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편으로 보냈잖아. 메시지도 남겼고. 당신이 확인 안 해서 내가 직접 온 거야.”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그 내용은 다소 책망에 가까웠다. 

“그랬어? 바빠서 놓쳤네.” 

“당신은 항상 바쁘지.” 

“음… 정말로 바빠서 그랬어.” 

“나도 알아.” 

순간 서늘한 침묵이 흘렀다. 경직된 분위기에 헨드릭은 빨리 이 자리를 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오느라 고생했어. 커피라도 마시고 갈래? 서류는 이따 검토할게.” 헨드릭은 급하게 겉치레가 잔뜩 들어간 말을 가져다 말꼬리에 덕지덕지 붙였다. 잠깐 싸늘한 눈으로 헨드릭을 바라보던 마리아는 이내 다시 지친 기색이 되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검토하고 메시지 보내줘. 나 이만 가볼게.” 

“그냥 가도 괜찮겠어?” 

“괜찮아. 당신 바쁘잖아.” 

이번에는 비꼬는 투가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마리아 모건인 이 여인은 참으로 배려심 깊고 상냥했다. 이제 그는 곧 마리아 휠이라는 이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건 마리아에겐 아주 큰일이었지만, 헨드릭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헨드릭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쉬어, 릭. 나 갈게.” 

“응. 서류 바로 검토해서 연락할게.” 

예의바른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가방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헨드릭은 긴 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정말로 피곤했다. 마리아가 기분이 상해서 돌아가겠다고 한 거든, 정말 그를 생각해서 돌아간 거든간에 헨드릭에게는 더없는 행운이었다. 역시 마리아 모건에겐 이용 가치가 있다. 이 여자의 상냥함과 다정함은 헨드릭에겐 아주 유용했다. 

바로 검토해서 연락하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헨드릭은 갈색 서류 봉투를 테이블에 방치해 두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몇날 며칠동안 잠을 못 잔 건지 슬슬 계산도 되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서 하자. 서류 안에 뭐가 써 있든, 헨드릭은 그냥 무조건 도장을 찍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사소한 조항 몇 개 따위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 늘 법의 그림자 사이를 기어다니는 헨드릭에겐 무법자 특유의 오만함이 있었다. 

할 일을 밀어두고 까무룩 잠든 헨드릭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그는 고주망태가 되어 있었다. 곁에는 사람도 없고 혼자였다. 있는 거라곤 빈 병뿐이었다. 그러니까 분위기에 취해 한 잔 두 잔 마시다가 취해버린 것도 아니고, 그저 혼자서 목구멍을 태울 듯이 술을 들이부었단 거였다.

정신이 술에 잔뜩 꼴자 어이없게도 담배까지 당겼다. 헨드릭은 주머니를 뒤져 지포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할 때마다 가느다란 불꽃이 켜졌다가 꺼졌다가 했다. 그는 라이터를 연 채로 흔들리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그랬지? 

가만히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늘 이런 생각이 든다. 

왜 그때, 마리를 그냥 보냈을까? 

그냥 보내지 않았다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그 날, 마리가 길거리로 나가지 않도록 뭔가를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휴일에 아내가 집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니까. ‘오늘은 우리 하루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놀자.’ 라고 한 마디만 했다면. 당신이 그러고 싶으면 그러자는 다정한 대답을 들을 수만 있었다면. 이혼 서류에 대해 몇 마디 주고받고 헤어지는 게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했다면. 

그때,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헨드릭이 번쩍 눈을 떴다. 그는 얕게 잠들고 빠르게 눈을 뜨는 데에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깨어나서 주변을 살피자 집안은 잠잠했다. 그냥 꿈속의 소리에 놀라 잠을 깬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다시 한 번 쨍그랑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술병이 깨지는 듯한 소리였다. 

“…….” 

헨드릭은 감각을 곤두세우고 방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집안에 깨진 물건은 없었다. 게다가 더 이상한 건 이렇다 할 불안감이 느껴지지 않는단 거였다. 마치 옛 친구가 불시에 방문하기라도 한 것처럼 기묘한 긴장감만 느껴질 뿐이었다. 헨드릭은 오랜 정보 요원 생활로 위협에 익숙했다.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도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왜 아무 위기감도 들지 않는 거지?

이상한 기분으로 집안을 한 바퀴 돌았을 무렵, 헨드릭은 실내로 들어오는 바람 한 줄기를 감지했다. 주방에 난 작은 창문 하나가 열려 있었다. ‘이걸 연 기억이 없는데.’ 헨드릭은 여전히 신중한 태도로 움직였다. 조심조심 발을 옮겨 주방 창문을 살피자, 거기엔 놀랍게도…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헨드릭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장갑을 낀 손이 힘없이 흔들흔들거렸다. 이런 습격은 난생처음이라 헨드릭은 긴장 반, 맥빠짐 반으로 물었다. 

“……어디에서 왔지?” 

 

S#■

우린 어디서 왔을까? 

나는 우리의 인생이 어디서 만들어지고, 또 어디로 갈지가 궁금해. 

놀라지 마. 요즘 생각이 많아졌다고. 이런 걸 궁금해한다고 운명이 바뀌는 건 아니라지만 혹시 모르잖아. 어쩌면 우리 같은 사람들을 만들어서 찍어내는 공장 같은 게 있을지도 몰라. 그런 공장이 있다면 너는 분명히 최상급 제품일 거야. 물론 나도 그렇지. 그렇고말고. 

하하하……. 

있잖아.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하나만 믿어줘. 

실패하고 망가지더라도 나는 나야. 

네가 아는 사람, 네가 믿는 사람. 네가 ‘이 녀석이라면 분명 그렇게 하겠지’ 라는 행동을 반드시 할 사람 말이야. 좀 먼 길을 돌아오긴 했지만 이제야 알았어. 사람들이 보는 나도 진짜 나란 걸. 왜냐하면 사람들은 떨어져서 살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생각한 너도 분명 진짜일 거라고 믿어. 

……나를 알아봐 주겠지? 

 

S#1

테드 라이어던은 요즘 어떤 꿈을 꾸고 있다. 

이 꿈은 특히 그가 피곤할 때면 어김없이 그의 무의식에 찾아왔다. 꿈 속에서 그는 유니폼을 갖춰입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위험한 일을 한다. 그 안에는 정신 사납게 구는 여자애도 있고, 능글거리는 술꾼도 있고, 철두철미한 동료도 있었다.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시끄럽고 복잡한데다가 혼란스럽기까지 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테드는 스스로가 대단히 차가운 사람이 아니란 걸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 팀원들은 제법 눈치가 좋아서 그가 뭐라고 길게 말하지 않아도 그의 심중을 대부분 알아차려 주었다. 만약 ‘이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한 번 더 모든 고난을 겪어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테드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질문자를 조금 어이없어하긴 하겠지만. 

꿈 속에서 테드는 때때로 어떤 일에 대해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일들에 대해서. 우리 모두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과 손 닿을 곳에 있는 그들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렇다 할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가슴은 답답했지만 뾰족한 수도 없었다. 문제는 언제나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들이닥쳤다. 깊게 골몰하고 적당한 답을 찾아내고 싶은 문제들도 시한폭탄처럼 머리 위에 초시계를 띄운 채 째깍째깍 테드를 위협했다. 

다행히도 테드 라이어던은 비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대책 없이 상황을 낙관할 수는 없어도 견딜 줄은 알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의 인생이 스파이더맨 영화처럼 흘러간다는 사실을 알고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바꿀 수 없는 일들이 나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운명에 저항할 수 있을까? 양립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두 개의 명제가 함께 갈 수 있을까?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삶이 정해져 있었다고 누군가 말한다 해도, 테드 라이어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게 왜?’ 라고 말할 거다.

꿈 속에서 테드 라이어던은 문득문득 노크 소리를 들었다. 그 노크는 문에서 들릴 때도 있고, 창문에서 들릴 때도 있고, 심지어는 사물함이나 머그컵 안에서 들릴 때도 있었다. 그는 어느 정도 신중한 성격이었으므로 쉽게 남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어떨 때는 그냥 바람이 흔드는 소리겠거니 하고 넘어가 버렸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방금 노크 소리 들었어?’ 하고 물으면 언제나 ‘무슨 소리가 났어?’ 라는 대답을 듣기 때문이었다. 

테드 라이어던이 무시하든 말든 꿈 속의 노크 소리는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조용했다가, 나중에는 요란해졌다가, 끝에 이르러서는 음악 소리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리듬감 있는 노크에 테드는 잠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가 금방 진정했다. 어쨌든 스스로가 미친 것 같지는 않았다. 시종일관 들려오는 것도 아니고 잊을 때쯤이면 한 번씩 귓가를 두드리는 소리니 무시하고 살아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노크 소리는 손톱 밑의 가시처럼 테드를 신경쓰이게 했다. 

꼭 스스로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방문자를, 그가 방문을 두드리기를 기다리며 모든 것을 준비해두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착각이었다. 그런데도 미지의 감각은 가슴 한 켠을 불안하게 했다. 

그리고 꿈이 한 달쯤 이어졌을 무렵이었다. 그 때 테드 라이어던은 가족과의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배가 부르고 조금 피로했다. 라이어던 일가의 어른들은 막내를 피곤하게 하진 않았지만, 관심을 숨길 기색도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똑똑한 테드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무엇에 관심을 가질지를 특히 궁금해했다. 테드는 적당히 예의 바르게 굴었다. 그는 결코 상냥한 성격이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온화하고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어느 정도 거칠게 굴지 않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푹신한 소파에 기대 있다 졸음이 쏟아졌다. 눈꺼풀이 자연스럽게 내려앉았다. 

‘아, 또 그 꿈을 꾸겠군.’ 

이제는 잠에 들기 전부터 예감할 수 있었다. 이 정도의 피곤함이면 꿈의 세계로 빠져들기 충분했다. 반갑지는 않았지만 꺼려지지도 않았다. 어느샌가 꿈 속의 생활은 그에게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자리잡아 있었다. 그러나 그 때, 어떤 소리 하나가 그의 잠을 깨웠다. 그건 바로 노크 소리였다. 

똑, 똑, 똑. 

노크 소리는 현관문에서 들려왔다. 테드는 오던 잠이 다 달아난 얼굴로 현관문을 노려보았다. 이 시간에 방문할 사람은 없다. 이윽고 노크는 격렬해졌다가, 그가 계속 반응이 없자 놀이마냥 리듬감 있는 박자로 울리기 시작했다. 테드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고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쳐다보면 무언가 답이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고, 골몰할 시간은 없었다. 노크 소리는 끊겼다. 문제는 제한 시간을 머리 위에 띄운 채 깜빡깜빡거리고 있다. 이럴 때의 대처 방법을 테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수많은 꿈 속에서 배웠다. 그는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새카만 밤. 

가로등도 다 꺼진 시간. 

문 앞에는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테드는 가만히 상대를 바라보다가, 눈이 점점 커지더니 곧 입을 열었다. 

“넌…….”  

 

S#■

그러니까……

나야. 

한 번 더 내 얼굴을 봐줄 수 있어? 

다시 내게 기회를 줄 수 있어? 

날… 받아들여주지 않을래? 

나한테……

문 좀 열어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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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 정보

​출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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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
Moon So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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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라이어던
Ted Riordan
호기, 청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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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별 
Han B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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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 모건
Hendrik Mo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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