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열화요수(2021)」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르릉, 쾅!
바위더미가 굉음을 내며 무너졌다. 붉은 머리칼의 소년은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다.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느새 동굴 입구는 크고 작은 돌덩이들로 메워져 오갈 수 없게 되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소년은 눈을 시뻘겋게 뜨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 야! 이 자식, 너 뭐 하는 짓이야!
검을 휘둘러 바위를 부수고 입구를 막은 건 푸른 옷을 입은 사내였다. 이제 그의 얼굴은 돌틈으로만 겨우 볼 수 있었다. 틈새로 비치는 일그러진 눈썹과 꾹 다물린 입술, 푸른 눈동자. 그 단편들이 꼭 조각난 초상화처럼 보였다.
- 뭐하는 짓이냐고 물었어! 너… 허튼 생각 하지 마!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소년은 어떻게든 돌덩이를 밀어내려 칼을 뽑았다. 검날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마침내 상대방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 나오지 마.
- 뭐?
- 거기 가만히 있으라고.
얼빠진 반문에 냉담한 답변이 돌아왔다.
- 헛소리… 이거 치워! 아니, 내가 치울 테니까 너야말로 꼼짝 하지 마!
그러나 이 차가운 대답이 오히려 소년의 가슴에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붉은 머리칼의 소년은 길길이 날뛰더니 앞뒤 가리지 않고 바위 덩이들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돌무더기가 자기 쪽으로 쏟아지는 건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 그만둬!
소년의 난폭한 해결법에 결국 사내가 버럭 화를 냈다.
- 입 다물어!
그러나 소년은 기가 죽기는커녕 더 기세를 높여 악을 썼다.
-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말 들어!
-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 넌 약하잖아!
순간 소년의 손이 멈칫했다. 건너편의 소음이 잠시 잦아들자, 사내는 이 방법이 통했다고 느낀 건지 기어코 한 마디를 덧붙였다.
- 방해된다.
- …내가 약해서… 곁에 있어봤자 방해만 되니까 여기 처박혀 있으라고?
- 그래.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소년이 굳은 듯 움직이지 않자 바위덩이들도 얌전히 제 자리를 찾아 입구를 촘촘하게 막았다. 암석이 잘게 부서진 탓에 오히려 이전보다 틈새가 더 적어진 것 같기도 했다. 이젠 그의 화난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떤 표정으로 나약하다, 쓸모없다 말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다음 순간, 먼 곳에서부터 웅웅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빗소리인가? 공기가 축축해진 것을 보면 비가 오는 건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발치의 돌 부스러기들이 달그락거렸다. 땅이 진동하고 있다. 이건 결코 장대비의 영향이 아니다. 푸른 옷의 사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웅웅대던 소리는 들뜬 사람들의 목소리로, 진노한 함성으로 바뀌었다. 문득 소년이 벼락을 맞은 듯 흠칫 몸을 떨었다. 땅이 울리는 건 기병이 몰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 야! 기다려!
- 가야 해.
붉은 머리칼의 소년이 다급하게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함성은 점점 가까워지고, 사내는 돌아섰다.
- 남궁휘!
입구가 막혀있으니 붙잡을 수도 없다. 악을 쓰듯 부른 이름도 닿지 않는다. 세차게 내리는 비는 모든 걸 지워 버릴 것만 같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바위를 베어내려 해봤자 이미 늦었다. 다 소용없었다.
- 남궁휘! 내 말 들어! 이거 치워!
그를 잡을 수 없단 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 사지로 보내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이 전투가 얼마나 길어질지, 이 전쟁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질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피와 고통이 닥칠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런 예상은 바보라도 할 수 있는데. 그 누가…
- 가지 마!
그 누가 마음 깊이 아끼는 사람을 전쟁터로 보내고 싶겠는가.
- 제발 가지 마…
그 누가…….
* * *
“라디오 꺼.”
“엑, 왜요?!”
“정신 사납잖아.”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흰 얼굴을 팍 구기며 말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짧게 다듬고 넥타이까지 갖춘 정장을 입은 사람이었다. 눈동자는 마치 구름이 흐르고 있는 맑은 하늘 같은 푸른색으로, 깎아낸 듯 차가운 분위기를 냈다. 반대로 조수석에 앉은 여자는 갓 애 티를 벗은 듯 앳된 얼굴이었는데, 분홍색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올려 묶고 푸른 눈을 반짝이는 모습은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들은 반질거리는 은색 차량에 몸을 싣고 황량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최근 유명세를 얻은 개그맨 듀오의 만담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만담에 맞춰 실없이 웃고 있던 홍어진이 고개를 휙 돌렸다. 남자가 멋대로 라디오를 꺼 버릴까 걱정됐는지 손으로 전원 버튼을 단단히 막은 채였다.
“요즘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요. 난공 주임님, TV도 안 보세요?”
어진이 억울한 투로 항변했다.
“안 봐.”
“인터넷은요?”
“안 해.”
난공후이가 여전히 인상을 쓴 채로 냉담하게 대꾸했다. 그 메마른 답변에 어진은 새삼스럽게 경악했다. 21세기에 태어나 TV도 안 보고, 인터넷도 안 하고, 심지어는 잘 떠들고 있는 라디오마저 꺼 버리려고 하다니! 이 꽉 막힌 주임이 웨이보 타임라인을 스크롤하는 모습은 영 상상이 안 되긴 했지만. 금수저 대신 스마트폰을 물고 태어난 ‘MZ세대’ 홍어진에게 난공후이는 옆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존재였다. 어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게 물었다.
“현대인 맞으세요?”
“맞다.”
“건성으로 대답하시는 거죠!?”
“아니야… 시끄럽다,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난공 주임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어진이 이크, 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마침 차량이 터널로 진입하며 어색한 침묵은 먹먹한 바람 소리로 메워졌다. 어진이 눈을 데굴 굴려 인상을 쓴 난공후이를 슬쩍 바라보았다.
젊은 나이에 이공국 주임 자리에 오른 난공 선생님께서는 늘 쌀쌀맞고 차가웠는데, 냉정해 보이는 얼굴과는 반대로 성격이 불 같아 조금만 건드려도 버럭 화를 냈다. 이렇듯 상냥함이라곤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청년이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법이다. 난공 주임은 이공국에서도 몇 찾아볼 수 없는 뇌화계(雷火系) 특능인이었다. 뇌화계 특능인은 드물고, 쓸만한 뇌화계 특능인은 더더욱 드물다.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정도의 화력에 조절력까지 갖춘 난공 청년이 이공국에 스카우트된 건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난공후이는 그 유명한 ‘난공’ 집안의 직계 도련님이다. ‘창천’을 슬로건으로 건 이 집안은 말 그대로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 권세와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곳이었다. 고대부터 명맥을 이어온데다가 집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특능인이니, 스스로를 특능세가 중 제일이라고 치켜세워도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특능세가의 자제분들은 대부분 가업을 잇거나 집안의 어르신들을 보조하며 일생을 보낸다. 특히 난공 가문은 가규가 엄격하고 가업을 하늘 같이 여겼다. 그들은 평생을 바쳐 뿌리 내린 땅을 수호하고 사악한 것들을 물리쳤다.
난공의 의뢰인들은 대부분 거액의 계약금을 턱턱 낼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이들이었기에, 가업을 물려받으면 명예 뿐만 아니라 부귀영화까지도 누리게 된다. 이런 사유로 뛰어난 자제들은 모두가 자진하여 가업에 뛰어들었다. 특능과 신체를 갈고 닦아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은 그들 인생의 당연한 목적이자 자랑거리였다. 돌연변이 하나가 툭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어느덧 차는 터널을 빠져나와 나무가 무성한 비포장도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진은 흘긋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앙상한 나무가 늘어뜨린 잔가지가 사이드미러를 수도 없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도로를 하염없이 달리고, 끝도 없이 터널을 통과하는 것보다야 볼 재미가 있는 풍경이었지만 ‘대체 언제까지 가는 거야?’하는 막막함은 여전했다.
끔찍한 어색함이 온몸을 휘감을 무렵 다행히도 라디오가 침묵을 깨 주었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치직거리던 라디오는 다시 제 소리를 되찾았다. 어느새 코너가 바뀌어, DJ가 낭랑한 목소리로 오늘의 운세를 읽어주고 있었다. 듣고 있자니 홍어진의 호기심이 죽지도 않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주임님은 별자리가 뭔가요?”
“몰라.”
“그러지 말고… 생일이 언제신데요?”
“1월 5일. 이건 왜.”
“그럼 염소자리네요. 어디 보자.”
마침 염소자리 운세가 흘러나올 차례였다.
[오늘 염소자리는 인연이 강한 운세입니다. 떠난 사람, 만나고 싶었던 사람, 자신조차 몰랐던 연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생의 인연이라도 만날지도? 두근두근, 기대해도 좋겠습니다! 오늘 염소자리 행운의 아이템은…]
“아, 전생의 인연을 만날 수 있대요!”
“넌 저런 걸 믿나.”
“완전 믿는 건 아니지만 조금은요. 믿으면 재밌잖아요.”
“그런가.”
“주임님은 전생을 믿으세요?”
불꽃을 담은 얼음 같은 난공 주임에게 이런 시답잖은 질문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마 이공국에서 홍어진 뿐일 것이다. 난공 주임은 역시나 앞유리에서 시선조차 떼지 않고 말했다.
“관심이 많다.”
“직장 상사한테 관심 좀 가질 수 있죠. 게다가 저희는 파트너인데요?”
라디오를 간신히 사수해낸 어진은 자신감이 좀 붙었는지 쫑알거렸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또 이런 상사에게 말을 붙여보겠는가. 홍어진은 원래부터 겁대가리를 다소 상실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발랄한 질문에도 난공 주임은 차갑게 답했다.
“부하 직원.”
“네?”
어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자 난공 주임은 전방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파트너가 아니야. 네가 부하인 거지.”
“에이, 그게 그거죠! 너무 까칠하게 구신다니까.”
“사실이잖아. 까불지 마.”
딱 자른 답변에 어진이 툴툴거리며 한 수 접었다. 백 년, 천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천재. 난공 가문의 자랑, 난공후이에게는 가문의 어르신들이 닦아둔 길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가문의 높으신 분들은 이 어린 소년이 무럭무럭 자라 가문을 잇는 상상을 하며 흐뭇해했더랬다.
그러나 아이는 마음먹은 대로 자라지 않는다고 했던가? 성년이 다가와 슬슬 진로를 진지하게 상의해야 할 무렵, 난공후이는 ‘이공국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난데없는 폭탄선언에 집안은 당연히 발칵 뒤집혔다. 아니, 이공국이라니? 우리가 대체 뭐가 부족해서? 좋은 거 먹이고 값진 걸 입혀가며 애지중지 키운 우리 막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 대체 누가 샤오후이에게 저런 헛바람을 넣은 거람?
난공세가 사람들에게 이공국이란 한마디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욕만 바가지로 먹는 곳’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돈과 명예를 누릴 수 있는 가업이 있는데, 왜 복을 걷어차고 이공국 요원이 되겠다는 걸까? 아무래도 우리 막내가 어려서 잠시 방황하는 것 같이, 잘 설득해서 올바른 결정을 하도록 도와야겠다.’
하지만 역시나 이것도 어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난공후이는 그 어떤 설득에도 넘어가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목소리로 우렁차게 소리를 치니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결국 난공 도련님은 이공국 채용 공고 시즌에 기어코 입사 서류를 제출했다. 그것도 고생길이 활짝 열린 외근직 특수부대 ‘풍신’을 희망 부서로 적어서.
“그런데 저흰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예요? 아침부터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도착을 못 하다니 이러다가 해가 다 지겠어요.”
“금방 도착해.”
“그 말도 벌써 다섯 번 째라고요.”
“……금방 도착한다니까.”
“이제 여섯 번…….”
난공 주임이 번개같이 고개를 돌려 눈을 부라리자, 홍어진의 투정이 쏙 들어갔다. 전 특수부대 풍신 소속이었던 난공후이는 이제 이공국의 간판이자 엘리트 집단인 ‘뇌정’의 주임 자리를 맡고 있었다. 뇌정의 이 두 특능인이 팀을 이뤄 외근을 다니기 시작한 건 채 3개월도 되지 않았다. 이 뇌정 주임 자리가 그에게 가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으나, 요약하자면 난공세가의 어르신들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물이었다. 그들은 애지중지 아껴 기른 막내가 고생만 하는 괴짜 돌연변이 모임에서 커리어를 마감하길 원치 않았다. 이러한 인사 배치는 인재를 낭비하는 짓이며 아주 큰 실수라고 큰소리를 치고 다녔으니, 난공후이의 반강제적인 부서 변경은 예정된 셈이었다.
뇌정으로 배속된 난공후이는 부서 이동과 동시에 주임을 달며 단숨에 승진했다. 이공국 내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그의 특능과 열정이 과하다 싶을 정도의 근무 태도 덕에 그의 초고속 승진에 별다른 논란은 없었지만, 이른 출세가 늘 그렇듯 따라붙는 소문만은 무성했다. 그 중 가장 신빙성 있는 소문은 그가 풍신에 있던 시절, 성질을 못 이겨 고장난 자동차와 문짝이 한 트럭을 채우고도 남는다는 거였다. 위력계 특능도 아닌 그가 자재 파손으로 경위서를 작성할 때마다 무시무시한 소문은 한 줄씩 더해져 갔다. 홍어진은 풍신 소속의 동료들로부터 들은 수많은 일화들을 떠올리며 난공 주임을 흘긋흘긋 바라보기만 했다.
“곧.”
“네?!”
“곧 도착이라고.”
“아, 아아…! 다 왔다고요, 저는 또!”
한창 난공 주임에 대한 상상을 펼치던 차에 불쑥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은 어진은 제 발이 저려 화들짝 놀랐다. 다행히도 눈치 없는 상사는 어진에 대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상사로서의 난공후이는 장단점이 명확했다. 현장 업무, 최상급. 서류 업무, 의외로 능숙함. 사교성, 최악. 융통성, 더 최악. 대신 쓸데없는 의심이 없고 방향성이 뚜렷함. 뭐 이런 식으로.
어느새 차는 자갈을 밟으며 산 중턱까지 올라와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차가 다닐 만큼 넓은 길이 없어 직접 올라가야 했다. 난공후이는 대충 차를 대고 이렇다 할 지시도 없이 냅다 차에서 내렸다.
“올라간다.”
“잠시만요, 장비는 준비하고 가야죠!”
“필요없어.”
“뭐가 필요 없다고 하시는 거예요? 외근안전부서에서 준비해 준 게 얼마나 많은데…!”
“이거면 충분해.”
홍어진이 외근안전부서에서 준비한 부적과 법기를 이것저것 꺼냈지만, 난공 주임은 검은색 정장 자켓 하나만 달랑 걸치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뭐가 충분하단 거예요?!”
“막아주잖아.”
“부적도 이렇게나 많고, 귀한 방울까지 있는데도요!”
“걸리적거린다.”
난공후이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 자켓 안쪽에 각종 주구가 명주실로 새겨져 있다는 사실은 홍어진도 알았지만, 그게 모든 걸 막아주지는 못한다. 홍어진은 방어구 하나만 걸치고 사지로 들어서려는 상사의 무모함과 자신감에 작게 경악했다. 난공 주임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이거였다. 남의 말이라곤 하나도 듣지 않고 무턱대고 일을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
“그래도, 그래도 외근안전부서에서 주신 건 다 뜻이 있을 거예요. 그 분들은 조사도 열심히 하셨고… 위기 상황에 요긴하게 쓰일 물건들도 많다고 하셨고요.”
홍어진은 장비가 잔뜩 든 종이 박스를 든 채 울며 겨자 먹기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난공 주임은 부하 직원이 울거나 말거나 성큼성큼 산을 걸어올라갔다.
“그렇게 좋으면 네가 써.”
“저를 위해서 보낸 물건이 아니잖아요!”
“파트너라며.”
“아까는 아니라고 하셨으면서!?”
“아니지.”
“이랬다 저랬다 하시면 언젠가 벌 받…….”
앞서 걸어가던 난공후이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가엾은 홍어진은 다시 합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흙과 바위로 뒤덮인 산을 올라갔다. 사실상 깎아지른 듯이 가파른 바위산에 흙이 조금 덮여 있는 수준인지라 매우 미끄러웠다. 어진은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는데 불친절한 상사는 그가 굴러떨어지기 직전에만 붙잡아줬을 뿐 부하직원이 넘어지건 말건 혀만 쯧 하고 찼다. “정말 너무하시네요!” 어진은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쫓아갔다.
아침부터 하도 오래 달려온 탓에 벌써 해는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아직 하늘은 푸른빛이었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어둠이 깊어지면 여러모로 불리했다. 그들의 이번 임무는 이상 에너지 수치가 기이할 정도로 높게 탐지된 동굴의 탐색이었는데, 보통 이런 건 선후과 직원들의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근직 요원들이 다루기에 위험도가 지나치다는 판단에 따라 특수부대원 두 사람이 파견된 거였다.
“여기예요. 여기 수치가 제일 높아요.”
어진이 윙윙대는 레이더를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진이 가리킨 자리에는 거대한 동굴 하나가 새카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동굴의 입구에는 바위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는데, 원래 바위로 막혀 있던 입구를 누군가 억지로 치운 것 같았다.
“누가 엉망을 만들어 놨네요! 사유지인데 간도 커라.”
“특능 범죄자 집단 아니겠나.”
난공후이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풍신도 폭우도 아닌 뇌정의 두 사람이 여기에 오게 된 이유는 소유권 때문이었다. 이 산은 봉래회의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특능세가의 사유지로, 일반인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산 내의 동굴이 파헤쳐지고, 파헤친 사람들은 행방불명이 된 채 목숨조차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특능세가에서는 이 일을 이공국에 의뢰했고 대외 활동 전문가인 뇌정에서 업무를 받아갔다. 물론, 난공 주임의 사회성에는 크나큰 문제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실력만은 확실했다.
난공 주임은 입구의 흔적을 거의 살펴보지도 않고서 뚜벅뚜벅 동굴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잠깐만요, 주임님! 좀 살펴보고…” 어진은 자기가 말해봤자 닿지 않는다는 걸 금방 깨닫고 그냥 발을 빨리 하는 쪽을 택했다. 이래도 무모하게 진입, 저래도 무모하게 진입할 거라면 혼자 보내는 것보다는 둘이 가는 게 낫겠지! 다행히 어진의 판단은 현명했고, 난공후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그의 뒤를 쫓을 수 있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네요.”
어진은 목을 살짝 움츠린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위로 된 동굴은 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넓었다. 굴이라기보다 또다른 차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한 치의 햇빛도 들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어둠이 깔려 있어서, 핸드폰 라이트를 켜도 얼마 안 가 빛이 어둠에 잡아먹혀 버렸다.
“……주임님?”
“왜 부르냐.”
“여… 여기에, 그러니까. 사유지에 침입한 사람… 이 있겠죠…?”
“아마. 왜.”
“……혹시 죽었을까요?”
“내가 어떻게 알아.”
“죽, 죽었다면 시… 시체가 있을까요?”
“죽었다면 그렇겠지.”
그 싸늘한 말이 어진에겐 거의 사망선고처럼 느껴졌다.
‘무서워!’
순간 겁이 더럭 난 어진이 발걸음을 빨리 하더니 난공 주임 뒤에 찰싹 붙었다. 성큼성큼 걷던 난공후이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어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왜, 왜요? 어… 얼른 탐색하고 가요.”
“무서운 건가.”
“……다, 당연하죠! 주임님은 무섭지도 않으세요? 시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데…….”
이 동굴의 공기는 이상하게 불안했다. 머리카락이 온통 쭈뼛쭈뼛 곤두서는 것 같아 어진은 괜히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왜 무섭지.”
“……주임님은 진짜 피가 파란 색인 거 아니세요?”
곧 난공 주임 특유의 ‘쓸데없는 소리’ 하는 표정이 이어졌다. 어진은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가, “맨날 왜냐고만 물으시고.” 하고 소심하게 반항했다. 난공후이는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다시 발을 앞으로 옮기며 말했다.
“빨리 나가고 싶으면 감지 해.”
“넵.”
홍어진이 오늘 난공후이를 따라 여기까지 오게 된 건 그들이 찰싹 붙어 다니는 파트너여서가 아니라 어진의 특능 때문이었다. 홍어진은 금속계 특능인으로 특히 금속 감응에 탁월했다. 상당히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비교적 작은 금속이라도 감지할 수 있는 이 능력은 특수 광물을 찾거나 사람을 찾는 데에 두루 쓰였다. 개인 소유의 동굴에 침입하는 사람 혹은 집단이라면 무기나 장비를 꼭 갖추고 있을 테니, 이번에도 어진의 특능은 빛을 발할 것이다.
“앗!”
아니나 다를까, 조용히 동굴 안을 걷던 어진이 큰 목소리를 냈다.
“찾았나.”
“아… 아마도요! 아직 정확하진 않아요, 반응이 미약해요.”
“어디.”
“아래… 아래? 어라? 이 아래쪽인 것 같은데요?”
“아래?”
두 사람이 동시에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아래엔 단단한 돌바닥 뿐이었다.
“이 아래라고 하는 건가.”
“네, 그런데… 잠깐만!”
그때, 앞서 걸어나가던 난공후이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거의 무의식적인 동작이었다. 그 가벼운 동작 하나가 거대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조용하던 동굴에서 갑자기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뭐, 뭐예요!? 주임님?!”
“나도 모른다! 움직이지 말고 있어!”
무책임한 답변과 거의 동시에 난공 주임이 서 있던 바닥이 쑥 꺼졌다. “꺅!” 어진이 참지 못하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한바탕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고, 가라앉았다. 어진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지면이 꺼진 부분을 바라보았다. 마치 동그랗게 오려내기라도 한 것처럼 바닥이 원 모양으로 뚫려 있었다. 게다가 그 아래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낭떠러지였다.
“설마 돌아가신 건 아니겠지…?”
어진이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자, 득달같이 대답이 따라붙었다.
“안 죽었다.”
“엄마야! 머, 멀쩡하면 멀쩡하다고 말씀을 하셔야죠!”
“말하려고 했어.”
어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동그란 구멍에 고개를 내리고 빼꼼 바라보았다. 여전히 난공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 보이는데요.”
“나도 네가 안 보인다.”
“그럼 목소리는 어떻게 듣는 거죠?”
“나도 몰라.”
아무래도 이쪽과 저쪽은 무슨 주술적인 장치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두 사람도 모르는 과학적인 작용이 있거나. 어쨌든 중요한 건 말이 통한다는 거였다. 둘은 우선 원리를 밀어두고 사태의 해결 방법부터 찾기로 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어진은 위를 지키고, 난공후이는 아래를 살펴보기로 빠르게 합의한 다음 탐색이 재개되었다.
“계속 감지해봐.”
“네. 하고 있어요. 그래도 바닥이 뚫려서 더 수월해진 것 같은데…”
“더 뚫어야 하나.”
“그러진 마세요! 그러다 동굴이 무너지겠어요.”
어진은 난공후이가 말하자마자 번개같이 천장을 부술까봐 두렵기라도 했는지 허겁지겁 그를 만류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난공 주임이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홍어진은 다소 안절부절못하며 장비를 뒤졌다. 아무리 찔러서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상사라지만 홀로 사지에 내려보내려니 영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너무 어둡지는 않으세요? 손전등이라도 내려보낼까요?”
“됐어. 이 쪽에서 밝히지.”
난공 주임이 손가락을 딱 튕기자, 스파크가 튀더니 푸른 불꽃이 둥둥 떠올랐다. 자그마한 불꽃은 주인의 말에 따라 아직은 아무것도 태우지 않고 있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이것이 바로 새내기 난공 주임이 특급 승진을 하게 된 계기이자, 그가 벽화랑碧火郞이라고 불리는 이유였다.
“별 일 있으면 꼭 말해 주셔야 해요.”
“알겠다고.”
예의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대답에 어진이 투덜거렸지만, 난공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부를 탐색했다. 작은 불꽃이 남자를 따라다니며 내부를 조심스럽게 밝혔다. 더 큰 불꽃을 일으킨다면 한 번에 동굴을 밝힐 수 있겠지만, 그거야말로 빈대 한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었다. 어쨌든 불은 불이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혼자가 된 난공 주임은 더욱 거칠 것 없이 성큼성큼 걸었다. 그 생각대로 정말 내부엔 아무것도 없었다. 드문드문 석순이나 종유석 따위가 보이던 위층과는 다르게, 아래쪽은 아예 매끄러운 암석으로 둘러싸여 있어 꼭 누군가 일부러 발라놓은 것 같았다. ‘허탕인가.’ 하며 돌아서려는 순간, 난공 주임에 시야에 뭔가 걸렸다.
“어.”
“뭔가 발견하셨어요?”
“뭐가 있어.”
“뭔데요? 잠깐… 대답은 해 주시고!”
이번 말은 통하지 않았다. 난공후이는 대답도 하지 않고 저벅저벅 ‘그것’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발견한 물건은 길쭉한 상자였다. 검은 나무 재질에 네모난 모양. 크기는 딱 사람 하나 만했다. 세상 경험 없는 난공후이 도련님은 난데없이 나타난 이 물건이 뭔지 몰라 고개만 갸웃거렸다.
“주임님!”
그러나 그는 생각보다 행동이 더 빠른 사람이라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청명한 목소리가 위쪽에서 메아리쳤지만 난공 주임은 가볍게 무시했다. 무시했다기보다 그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조차 않았단 게 맞았다. 난공후이는 냅다 팔을 뻗어 상자를 뒤집었다. 뚜껑이 없는 상자라 뒷면을 확인하려는 생각에서였다.
상자를 뒤집으니 정체는 확실해졌다. 이 길쭉한 나무 상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관이었다. 상자를 뒤집었는데도 뚜껑은 떨어지지 않고 관에 딱 달라 붙어 있었다. 또, 관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마치 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 같았다.
사실 다른 것보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바로 관에 길다란 칼 하나가 박혀 있다는 거였다. 아마 이 칼이 뚜껑이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고대에나 쓰였을 법한 장검은 손잡이에 옥으로 된 장식이 달려 있었다.
‘이게 뭐지?’
난공 주임은 생각이 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의문과 동시에 행동했다. 난공 주임이 손을 뻗어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난공 주임님, 방금 뭔가 느낌이…!”
그 순간, 홍어진의 목소리를 덮으며 관이 무섭도록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 나오기 위해 요동치는 것 같았다. 난공 주임은 엉겁결에 붙잡은 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하나도 녹슬지 않은 은빛 날이 관으로부터 쑥 뽑혀져 나왔다. 주인 옆을 떠다니던 푸른 불꽃이 부산스럽게 손 안의 검을 비췄다. 검신에 쓰여 있는 글자가 푸르게 번득였다. ‘필경必炅’.
우지끈!
검을 살피고 있는 사이, 관 쪽에서는 또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서 보니 검은 나무 관은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위쪽에서는 여전히 어진이 뭐라고 외치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관이 부서진 순간부터 어진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관 쪽에서는 불길한 그르륵, 그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난공후이는 조금 떨어져서 그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잔해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더니 대비할 틈도 없이 빠르게 난공후이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무슨…!”
명색이 특수요원인 그는 저항하려고 했지만, 상대방의 힘이 어마어마했다. 난공 주임은 그만 손에 잡고 있던 검을 놓치고 말았다. 그들은 그대로 엉켜 암석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이윽고 벽에 부딪히자, 괴한은 그를 아예 바닥으로 밀어 붙였다. 쿵 소리와 함께 벽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이대로 그를 내리쳐 곤죽으로 만드려는 것 같았다. 난공 주임도 더 당해줄 수 없어, 주변에 푸른 불꽃을 피워내 반격하려던 찰나였다.
“……!”
“……?”
불꽃이 피어나며 주변이 확 밝아지자, 순간 괴한이 움직임을 우뚝 멈췄다. 불꽃을 피워 적을 후려치려던 난공 주임은 상대가 멈추자 덩달아 멈칫했다. ‘이 틈에 해치워야겠군.’ 곧 정신을 차린 그가 불꽃을 움직이려던 때, 상대에게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궁휘?”
“뭐?”
시커먼 괴한은 몇백 년은 말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목이 잔뜩 잠겨 있었다. 난공 주임은 우선 자신을 습격한 범인이 의사소통이 안 되고 발톱과 이빨이 날카로운 괴물이 아니라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놀랐다. 그러나 그는 ‘뭐든 대화로 먼저 해결하자’고 주장하는 마음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빈틈이 이어지자 우선 팔을 힘껏 휘둘러 상대를 내던져 버렸다. 괴한은 언제 억세게 달려들었냐는 듯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날 뭐라고 부른 거야.”
“남궁휘…….”
“남궁휘?”
난공 주임은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푸른 불꽃은 난공 주임의 잘생긴 얼굴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얼굴도 비춰주었다. 괴한의 꼴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삐죽삐죽 자란 붉은색 머리카락은 멋대로 풀어헤쳐져 있었고, 얼굴에는 커다란 흉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긴 소매 너머로 드러난 손에도 빼곡한 흉터가 엿보였다. 자그마한 몸을 감싼 옷은 검은 수의로 가슴 중앙에는 칼이 박힌 자국이 선명했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 난공후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살아있는 사람 같은 몰골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깊게 잠긴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말했다.
“너… 너, 대체 어디에 있다가… 지금까지 어디 있다가 이제서야 온 거야?”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살아 있었어? 분… 분명.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살아있다. 그러니까 여기 있겠지. 그보다 너,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그래? 살아있었다… 살아있었다고.”
“…….”
그가 새빨간 눈으로 난공후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살아있었다면…….”
어느새 그의 주변으로 흉흉한 기운이 넘쳐 흘렀다.
“왜, 돌아오지 않았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왜 나를 여기 뒀지?”
“이봐!”
“왜…… 왜 나를 버렸어!”
그가 소리치자 동굴이 마치 응답하는 것처럼 쩌렁쩌렁 울렸다.
“윽… 오해하고 있다고 했잖아! 시끄럽게 굴지 마!”
그러나 난공 주임은 기세 싸움에서 질 생각이 없었다. 그 역시 우렁찬 목소리로 상대를 꾸짖었다. 그러나 괴한은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듯한 호통에도 전혀 기가 눌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악에 받쳤는지, 몸을 날려 난공 주임을 쓰러뜨렸다.
“이게……!”
난공 주임은 푸른 불꽃을 피워 괴한을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수의가 타고 손이 열에 눌러붙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아픔을 모르는 사람 같은 태도였다. 그러나 얼굴은 그와 상반되게도 깊은 고통에 물들어 있어, 무엇을 느끼는지 종잡기가 어려웠다.
그와 자신이 딱 붙어 있는데다가 이 동굴 안에는 어진까지 있으니 더 큰 불을 내기도 어려웠다. 불꽃이 통하지 않자 남은 건 힘뿐이었다. 힘을 주어 그를 뿌리치려던 난공후이는 밀어내는 게 어려우니 반대로 끌어당기기를 택했다. 휙 끌어당겨진 괴한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딱딱한 암석 바닥에 머리를 쾅 내려찍었다.
그때, 기적같이 홍어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주임님! 주임님, 제 말 들리세요? 아까부터 아래쪽 기운이 심상치 않아요! 이상 에너지 레이더도 엄청 시끄럽게 울리고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홍어진!”
“네! 살아계신 거 맞죠!?”
“아래에 뭐 없는지 스캔해봐!”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빨리!”
괴한은 이제 이마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몸이 비틀거릴 때마다 흉악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이건 필시 보통 일이 아니다. 상대는 사람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만났던 조무래기 요괴도 아니고. 그럼 대체, 가슴에 칼이 박히고도 머리가 박살나고도 움직이는 저 괴생명체는 대체 뭐란 말인가!
“아, 알겠어요. 지금 스캔하고 있어요. 레이더가 잘 작동하지는 않는데…”
“이상 에너지 반응이 제일 큰 곳을 체크해!”
“나, 나, 난공 주임님 근처요! 뭔가, 짐승 같은 게… 아니, 사람 같은 모양인데… “
“그거 말고!”
괴한이 피범벅이 된 몸을 다시 난공후이에게 던졌다. 난공후이는 그의 몸이라도 봉인하기 위해 자신을 중심으로 둥근 불꽃을 펼쳤다. 이 불꽃에 특능 에너지를 불어넣으면 움직임을 봉인하는 진陣처럼 쓸 수 있었다.
“그게 아니면… 아, 주임님 기준으로 2시 방향, 500m 정도요!”
“뭔진 보이나?”
“뭔진 모르겠어요! 하지만 금속이에요! 레이더에 찍히는 모양은 작은데… 무거운 금속… 단지나 램프 같아요!”
어진의 말에 난공후이는 바로 몸을 움직여, 불꽃의 진으로 괴한을 밀어넣고 달렸다. 타오르는 불꽃 고리 안에 갇힌 그는 몸을 미친듯이 움직이며 괴성을 질러댔다.
“대답해! 왜 나를 버렸어!”
“말이 안 통하는데 대답을 할 필요가 뭐가 있지!”
“돌아오지 않았잖아!”
“시끄러워!”
“왜, 왜 지키지도 못할…….”
무어라 말하려던 그는 말을 잇는 대신 고리를 쾅 내리쳤다. 아무래도 이 괴한은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화가 나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말을 이어나갈 때마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기세는 더 흉흉해졌다. 불꽃 고리가 괴한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있었지만 그리 오랜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곧 그가 고리를 뚫고 나올 것이다. 그 전에 뭔가를 찾아내야 했다.
이런 존재가 관에서 깨어났다면, 외부 압력에 의해 제압되어 봉인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부주의한 난공후이가 검을 건드리며 봉인에 관련된 주술을 깨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정도의 힘을 가진 요마라면 분명 봉인할 때 제어구를 함께 준비해 두었을 것이다. 난공후이가 찾는 건 바로 그 제어구였다.
“주임님! 찾으셨어요!?”
“거의.”
오후 2시 방향으로 달리자, 부서진 관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어진이 가르쳐준 지점은 아무래도 그가 처음 관을 깨고 나온 장소인 것 같았다. 다른 걸 더 찾아보라고 지시하려던 찰나, 난공후이는 관의 파편들 속에서 금속 단지 하나와 반으로 부러진 검을 발견했다.
“주임님, 그게 쫓아오고 있어요! 뭔지는 모르겠지만요!”
“나도 안다!”
쾅, 소리와 함께 불의 고리가 만들었던 진이 깨졌다. 푸른 불꽃은 화르륵 타올랐다가 녹은 듯이 사라졌다. 괴한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난공후이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난공후이는 재빨리 금속 단지를 열려고 했지만, 뚜껑이 없는 단지인데다가 이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그는 아까 놓쳤던 검을 바닥에서 주워 단지를 내리쳤다.
──쩡!
세상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눈부신 빛이 터져나왔다. 가장 가까이 있던 난공후이는 물론, 달려들던 괴한과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어진까지도 빛에 시야를 잠시 잃었다. 그 사이, 단지 안에 있던 무언가가 균열을 통해 쏟아져 나와 괴한과 난공후이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흐려졌던 시야는 꼬박 몇 분을 흘려보내고 나서야 돌아왔다. 난공후이는 시야가 돌아오자마자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이건…?”
그러나 주변은 아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난공후이는 약간 어리둥절한 채로 제자리를 한 바퀴 돌았다. 어느새 주변은 두렵고 새카만 암흑이 아닌, 자연스러운 밤의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날씨는 꽤 추워서 흰 입김이 나왔다. 곳곳에는 붉은 등이 드리워져 있었고, 사극에나 나올 법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저마다 즐겁게 재잘거리며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여기서 말하는 그들이란, 난공후이와 괴한이다. 산발을 하고 알 수 없는 말만 지껄이며 죽어라 난공후이에게 달려들던 그는 어느새 멍하니 서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펑,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밤하늘이 형형색색으로 물들었다.
“…….”
그 모습에 난공후이도 별 말을 늘어놓지 않고 일어나는 일을 살폈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대처였다. 살펴보니 소리의 주인공은 불꽃놀이였다.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불꽃들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난공후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잠깐 바라보았다가 괴한을 살폈다. 놀랍게도 그는 갑자기 달려들 기미가 없었다. 머리를 늘어뜨린 괴한은 넋을 잃은 얼굴로 한 방향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라도 있나.”
그 말은 물음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답은 괴한의 입이 아니라 시선 끝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의 눈이 닿는 곳 끝에는 푸른 옷을 입은 사내와 붉은 머리칼의 소년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높게 올려묶은 사내는 찐빵처럼 생긴 만두 하나를 소년에게 건넸다.
- 이… 이걸 왜 나한테 줘.
키가 작은 소년이 만두를 받아들며 떨떠름하게 말했다.
- 좋아하는 것 같기에.
- ……너답지 않게 왜 이래?
- 뭐가. 좋아하는 것 아니었나.
- 그런 게 아니라…….
소년은 말을 흐리더니 만두를 양 손으로 받고 어쩔 줄 몰라했다. 사내는 무심한 눈길로 소년을 바라보다가 다시 발길을 옮겼다. 발을 움직이지 않아도 주변의 모습은 마치 그들을 따라가는 것처럼 걸음걸음 바뀌었다. 아무래도 이 광경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환상인 듯했다.
- 너 이상해.
- 뭐가.
- 원… 원래 축제 같은 것은 좋아하지도 않잖아.
- 네가 좋아하는 것 아닌가.
- 이, 이러는 것도 이상하다고!
-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면 말 해.
-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요즘은 이럴 시기가 아니라면서, 불꽃놀이며… 시끄러운 것도 다 싫다고 했으면서 이러니까 그렇지.
- 글쎄. 생각이 바뀌었어.
사내의 말에 소년은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멍청하게 겨우 띄워낸 얼굴 같았다. 괴한은 여전히 환경幻境 속의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곧이어 따끈따끈한 만두를 손에 든 사내가 말을 이었다.
- 전쟁이 끝나면, 이런 날들이 이어질 테니까.
- …….
- 그땐 또 여기서 함께 거닐지.
- 나하고… 다시 여기 오겠단 소리야?
- 그래.
문득 난공후이는 그 사내의 얼굴이 자신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짙은 눈썹과 날렵한 눈매, 하늘 같은 푸른 눈동자까지. 그 옆에 있는 소년은 괴한과 생김새가 완전히 똑같았다. 다만 환상 속의 소년은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데다가 눈빛이 흉악하지 않아 같은 사람이란 걸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소년은 날이 선 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상대를 아끼는 마음은 숨길 수 없어 넘쳐 흐르고 있었다.
“다시…….”
불쑥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공후이가 고개를 돌려, 붉은 머리를 늘어뜨린 소년을 바라보았다.
“다시 여기에 오겠다고 했는데. 나와 함께…….”
“…….”
“내가… 보기 싫어서 오지 않은 거야?”
“…….”
“나를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살아있는데도 나를 찾아오지 않은 거야?”
“그런 게…….”
난공후이는 무심코 누군가를 변호하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내가 왜 변명하고 있지?’ 하지만 이 석연치 않은 느낌은 어쩐지 지워지지가 않았다. 가슴 한 구석이 구겨져서 자꾸 그 자국이 신경 쓰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게 아닐 거다.”
난공후이는 결국 애매한 말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변호했다. 어느덧 환경 안은 풍경이 바뀌어, 어둡고 축축한 동굴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바깥에서는 세차게 비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빗소리에 섞여 함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목소리들이 흘러들어왔다. 키가 작은 소년은 지친 얼굴로 쪼그려 앉아 동굴 입구에 기대어 있었다. 바위 부스러기와 검이 떨어져 있었지만 입구는 여전히 굳게 봉쇄되어 있었다. 이곳에 갇힌 뒤로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았다. 소년은 무릎을 모아 안은 채로 중얼거렸다.
- 돌아올 거야…
“…….”
- 돌아온다고 했어…
“…….”
- 다시 나와 축제를 보러 가겠다고 했어. 다시 나와 거리를 거닐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반드시… 돌아와야 해…….”
괴한의 낮은 중얼거림이 소년의 독백 위로 겹쳤다. 난공후이는 어째서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소년이 기다리던 그 사내는, 축제의 밤을 다시 한 번 약속한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주임님! 난공 주임님, 들리세요?]
그때, 난공후이의 자켓에서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홍어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린다.”
[지금 사람을 불렀어요! 아마 난공 주임님 주변으로 결계나 주술 같은 게 펼쳐진 것 같아요. 그걸 깨 달라고 할게요.]
“아니… 깨지 마.”
[네!?]
“주술을 깨지 말고, 나만 끄집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분명 있어.”
[그건… 왜요?]
“필요해.”
[알겠어요.]
어진은 그 말을 끝으로 이공국 요원들과 연락하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동안 환경 안에서도 천천히 시간이 흘러갔다. 소년은 동굴에 갇혀 하염없이 꺼내줄 사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일 년, 삼 년, 오 년, 십 년… 백 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어째서인지 소년은 늙지 않았다. 어쩌면 죽은 채로 이승을 떠나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수백 년이 흐른 뒤, 누군가가 동굴의 문을 열었다.
돌아왔구나!
그 생각만으로 가득 찼던 소년은 낯선 이의 침입을 견디지 못했다. 동굴에 들어오는 이를 전부 찢어발기는 귀신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동굴에 토벌대를 보내고 결국 그를 동굴 깊숙이 봉인했다. 검은 관에 붉은 머리의 귀신을 넣고, 주술이 담긴 단지와 부러진 칼을 함께 둔다. 그리고 검으로 찔러 봉한다. 그 검은 고대에 어떤 무사가 사용하던 것으로, 그는 처음 출진한 전쟁터에서 죽어 유골조차 남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그 모든 일들이, 그 모든 기억이 환경 안에서 빙글빙글 맴돌았다. 이건 분명 주술이다. 아마도 붉은 머리칼을 가진 괴한, 한때는 소년이었던 이 자의 기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괴한의 새빨간 눈에서 이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아직까지도 못박힌 채 환상을 보고 있었다. 이마가 찢어지고 수의를 입은 그가 눈물을 뚝뚝 흘리자 더욱 두렵고 사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속 어딘가에서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애틋한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미 다 지난 일일 텐데.
그저 수백 년 전의 일을 되풀이하며 보여주고 있을 뿐인데도, 어째서 그는 이토록 가슴아파하는 걸까. 어째서 이토록 눈물이 흐르는 걸까.
어째서 깊고 어두운 분노조차 한낱 그리움을 이길 수 없을까.
* * *
“휴, 정말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지 뭐예요! 다들 제때 와주셔서 다행이에요.”
붉은 머리칼을 가진 요마는 봉인되고 동굴은 폐쇄되었다. 주술 속에서 난공후이를 끌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그 주술의 대상은 붉은 머리칼의 요마고, 난공후이는 그저 우연히 끌려들어간 것에 가까운 듯했다. 사유지에 무단 침입했던 이들의 시체는 동굴 지하를 면밀히 탐색한 끝에 찾아낼 수 있었다. 난공후이가 별안간 아래로 빠졌던 것처럼, 그들도 다른 루트를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가 낙사한 것 같았다.
“소회溯洄라고 한대요.”
“소회?”
“네, 파견 오신 분들이 설명해 주셨어요. 고대 종족의 7대 악주惡呪 중 하나인데… 누군가를 보고 무언가를 떠올리면, 그걸 그대로 겪게 되는 주술이라고 했어요. 기억이 빙글빙글 돌면서 주술에 당한 사람을 가두는 거죠.”
“별 게 다 있군.”
“그렇죠? 뭔가 생각하는 게 그대로 떠오른다면, 빠져나오기는 엄청 어려울 것 같아요.”
난공후이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환경을 바라보던 그를 떠올렸다. 어쩐지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주임님이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며 안도의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어진의 목소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돌아가는 길에도 운전은 난공후이가 했다. 홍어진은 신나서 다시 라디오를 틀었다. 어느새 깊은 밤이 되어, 라디오 채널에서는 DJ가 신청곡을 틀어주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차분한 DJ의 목소리가 차 안을 메웠다.
[이번 사연은, 그리운 사람을 만나고 싶은 분께서 보내주셨습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만나지 못해, 어느샌가 한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연이란 건 분명 있겠죠? 인연이 있다면 우리의 인연은 분명 삼생을 넘어서도 이어질 인연이라고 믿습니다. 낭만적인 사연이네요. 신청곡도 아주, 애절한 노래로 보내 주셨는데요. 함께 들어볼게요…]
이윽고 인연과 재회, 그리움을 노래하는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난공후이는 결국 손을 뻗어 라디오 전원을 꺼 버렸다.
“앗?! 뭐예요, 갑자기!”
“시끄럽다.”
홍어진이 투덜거렸지만, 그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창밖은 어둠이 내려앉아 고요하고 적막했다. 형형색색의 불꽃도 추억도 그저 환상일 뿐이다.
* * *
- 남궁휘! 내 말 들어! 이거 치워!
악을 쓰는 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바깥은 장대비와 말발굽 소리, 그리고 피바람으로 가득했다. 남궁휘는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바위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 화를 내고, 억울해할 것이다. 어쩌면 슬퍼할지도 모른다.
- 네가 걱정한단 거 알아.
- …….
- 하지만 가야 해.
하지만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다. 그는 가야만 한다. 검을 뽑아 세상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 그의 의무이고 태어난 이유니까. 아무리 가지 말아달라고 아무리 애원한다고 해도 들어줄 수 없다.
- 구산.
- 너…….
- 돌아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빗속에서 남궁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아쉬움도 없는 사람처럼 뒤돌아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몇백년간 구산이 붙잡은 건 오직 그 말 한 마디였다.
그러나 지켜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