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이 된 의뢰는 별것 없었다. 때문에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를 더듬는 건 무용한 일이다.
화인은 요괴와 태오 사이를 가로막고 선 채 그의 흉흉하게 빛나는 금색 눈을 쏘아보았다. “…뭘 하려는 거야.” 반쯤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흐느적거리던 태오가 문득 등을 곧추세웠다. 압박감이 돌풍처럼 밀려왔다. 화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뿐히 걸친 겉옷 소맷단이 거칠게 펄럭인다. 항상 다정함을 잃지 않던 아르바이트생은 영혼이 거꾸로 뒤집어진 사람처럼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끝에 작은 태양과 같은 아름다운 광채가 어린다. 그가 노리는 게 무언지 깨달은 화인은 관두라는 외침과 함께 지면을 박찼다. 흙먼지가 부옇게 나르고 그 틈새로 인간의 피와 살점을 씹어 삶을 연명하던 요괴의 거대한 몸체가 쓰러졌다. 그야말로 태양을 정면에서 맞닥트린 나머지 날개를 잃고 추락한 신화 속의 존재처럼.
“태오, 아니지,” “…….” “당신 누구야.” 간신히 붙은 요괴의 마지막 숨통을 거두기 위해 그 손이 목덜미를 움켜쥐려던 찰나다. 화인은 그와 같은 사람의 손으로 태오를 막아섰다.
아름다운 위광에 둘러싸인 두 손이 서로를 붙들고 교차하는 순간, 시간은 순식간에 뒤로 되감아졌다.
―일주일 전.
“너.”
때는 조례시간이었다.
평소보다 늦장을 부리는 담임 교사를 기다리며 태오는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몽롱하니 생각이 길게 이어지지 않는 날이었다. 사고가 흐르는 모든 회로마다 암막이 드리워진 기분. 그는 떠오르지 않는 걸 강제로 끌어올리는 대신 창밖에 신경을 쏟았다. 태오가 앉은 1분단 둘째 줄은 교정의 거대한 벚나무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이기도 했다. 한여름에 접어들며 지금은 꽃 대신 울창한 푸른 잎이 무성하다. 그 사이로 쏟아지는 바람은 신묘한 피리 소리처럼 들렸다. 솨아아아.
거미줄처럼 얽힌 나무 그늘 틈새로 새어든 빛이 유달리 눈부셨다. 아름답네. 감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교실의 소란스러움을 뚫고 바짝 다가온 인기척이 바로 태오의 앞에 멈춰 섰다.
“어라. 방금 나 부른 거였어?”
“그래.”
대화 한 번 해본 적 없는 동급생이 그곳에 서 있었다.
태오보다 조금 작은 키의 동급생은 1분단 셋째 줄의 주인이기도 했다. 자리가 인접해 있음에도 이 동급생의 얼굴이나 목소리를 이토록 선명하게 인지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수업을 제때 참여하는 법이 없던 데다, 어쩌다 등교한 날이면 책가방 하나 없이 설렁설렁 와서는 남은 시간을 모두 잠으로 보내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금발…염색이구나. 거뭇하게 올라온 뿌리를 보며 태오는 망연히 그런 감상을 가졌다. “음. 그러니까,”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가슴팍의 명찰이었다. 유화인. “화인?” 여상한 태도를 가장하며 이름을 부르자 화인이 한쪽 눈썹을 씰룩였다. 생동감이 없다 못해 다소 무기질적으로 느껴지는 은회안이 천천히 태오와 눈을 마주한다. 느리지만 군더더기 없는 행동을 보며 태오는 생각했다. ‘아, 또, 기분 상했네.’ 그러고는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가 이상하다는 걸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또? 나, 이 애랑 제대로 대화해본 건 이번이 처음 아닌가.
“…하.”
“…나한테 할 말 있어? 아직 조례 전이니 지금이면,”
“됐어.”
당장 뭐라도 하나 부술 기세로 성큼성큼 다가왔던 동급생은 태오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입을 다물었다. “짜증 나네.” 마지막으로 남겨진 말은 그런 거였다. “뭐?” 앞뒤 맥락을 다 자른 짜증에 태오가 황당하게 반문했다. “내가 뭘 했다고…”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화인은 이럴 걸 예상한 동시에, 예측하지 못한 사람처럼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야아. 내가 뭘 했냐니까.”
금세 관심이 떨어졌는지 뒷자리로 향하던 화인은 태오의 끈질긴 질문에 눈을 가늘게 떴다.
“나한테 묻지 마. 멍청이.”
눈초리는 곧 째려보는 것처럼 변했다.
“또?!”
서글서글하니 성격 좋기로 유명한 선우태오여도 이유 없는 2연타 공격엔 난감함을 금치 못했다. 황당하기도 당황스럽기도 했으나, 굳이 말꼬리를 걸고넘어지지 않은 건 입에 가시가 돋친 듯 차가운 말만 내뱉는 화인에게서 미약하게나마 배반감의 기색이 읽혔기 때문이다. 눈썹에 잔뜩 들어간 힘이 빠지는 걸 본 화인은 더 이상의 대화 의사가 없다는 걸 표명하듯 자리에 엎드렸다. 단호하게 세워진 벽에 태오는 할 말을 잃었다.
둘 사이로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쪽을 보고 수군거리는 애들을 뒤늦게 확인한 태오가 웃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얼마 안 있어 출석부를 옆구리에 낀 담임 교사가 들어왔다. 교탁에 서서 교실을 둘러보던 담임 교사는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태오를 보곤 턱을 까딱였다.
“뭐야, 반장. 감기는 다 나았어?”
“네?”
“감기 들어서 이틀이나 결석해 놓고 네? 는 무슨 네? 야. 녀석 참.”
아무튼 허우대 멀쩡한 놈들이 더 비실거릴 때가 있다니까. 안 그러냐. 가벼운 농조에 태오를 두둔하는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화기애애하게 터져 나왔다. 선생님도 전에 감기 잔뜩 걸리셨으면서요! 예끼, 너희랑 내가 같아? 아, 물론 저희랑 쌤이 같진 않죠. 오냐. 방금 말한 놈 잘 걸렸다. 아이, 쌤! 와르르 터지는 웃음 사이에서 오직 태오만이 이질감을 느꼈다.
감기로 결석이라니. 그런 기억은 조금도……
‘잠깐, 반장!’
누군가의 외침이 간헐적으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처럼 번뜩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눈꺼풀 안쪽에서 여러 풍경이 번갈아 가며 스쳤다. 동굴. 작달막한 키에 목이 뱀처럼 긴 여인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보고 있다. 자신은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제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꽉 끌어안은 채 온몸을 거칠게 흔드는 손길이 있었다. 그건.
그 손의 주인은.
“아, 윽.”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머릿속은 삽시간에 안개가 낀 듯 모든 게 새하얗게 날아가며 약한 두통이 일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태오가 고개를 살짝 떨궜다. 불규칙한 목소리들 사이로 이상한 소음이 계속해서 침범했다. 풍덩. 큰 물웅덩이에 무게 있는 덩어리가 빠져드는 소리. 뒤이어 귀가 하염없이 먹먹해진다. 물가 아래로 한없이 떠밀려 떨어지는…기분. 이명이 짧게 울렸다. “뭐냐. 아직도 컨디션 나쁜 거면 보건실이라도 가 있어.” 어느새 온 교실이 조용해지고 마지막으로 마주치는 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담임 교사였다.
“그,” 바람 부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태오는 머쓱하게 웃으며 뒷목을 문질렀다.
“그럴 정도는 아니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끝에 식은땀이 묻어났으나 이 정도는 교실에 틀어둔 선풍기 바람으로도 금방 마를 터였다.
별일 아니겠지. 별일 아닐 거다. 어제 이상한 꿈이라도 꿨었던가. 생각을 빠르게 전환하며 태오는 부지런하게 서랍 안 교과서를 꺼내 들었다.
그런 자신을 바로 뒷자리 동급생이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그날은 종일 컨디션이 이상했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미열이 약하게 나고 있어 태오는 이 열감을 두통과 기이한 환청의 주된 사유로 꼽았다. 진통제를 한 알 복용하고 잠든 그는 밤새 열이 떨어지지 않아 몸을 뒤척였다. 더워. 힘들어. 머리 아파.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호흡만 색색 반복하던 참이다. 불현듯 어디선가 시원한 밤바람이 흘러들어왔다. 딸랑. 유리와 유리가 부딪치는 맑은소리가 울렸다. 여름밤의 미풍은 식은땀과 열로 끈적하게 남은 불쾌감을 모두 거두려는 듯 살랑살랑 불어왔다. 한기가 느껴질 만큼 차가운 손이 태오의 이마를 짧게 짚었다. 엄마인가? 비몽사몽인 와중, 눈을 뜨려던 태오의 시도는 애석하게도 실패로 돌아갔다. 돌덩이가 꽉 누르고 있는 것처럼 눈이 무거웠다.
“…서야…이지 않는 게 당연….”
한결 나아진 잠자리에 호흡이 골라진다. 태오는 언뜻 들린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 듯한 목소리. 거기에는 밤에 듣는 파도 소리처럼 기이한 마력이 스며 있었다.
정체를 식별해 내기에는 흔적이 턱없이 부족했다. 열감이 남은 몸은 야트막한 호기심에 힘입어 본능처럼 차가운 손을 쫓았다. 작게 흘린 웃음소리가 마지막으로 남은 거품처럼 보글보글 들려오다 곧 사라졌다.
태오가 정신을 차린 건 동이 틀 무렵이었다.
열 기운이 떨어져 가뿐해진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는 텅 비어 고요한 제 방을 좌측 구석부터 우측 끝까지 샅샅이 훑었다. 문은 얌전하게 닫혀 있었다. 물건 배치는 잠들기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흐트러진 책가방조차 그대로인 방. 마지막으로 확인한 창문 역시 잠긴 그대로다. 단단한 쇠고리를 노려봄도 잠시. 태오는 곧 지난 새벽의 일을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외부에서 괴한이 침입한 흔적이 조금도 없으니 그 일도 결국에는 꿈에 불과했다. 태오는 몽상가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더더욱 현실적인 사유를 얼마든지 꾸며 붙일 수 있었다.
만일 어디로든 이어져 여닫을 수 있는 문과 공간이 있다면 또 모를까.
“꿈이겠지.”
그는 여즉 찬 기운이 남아있는 듯한 제 이마를 두어 번 문지르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있었다. 어디에서든 부르면 열 수 있는 문.
그 문을 목격한 건 이튿날 점심시간이었다. 아직 나른한 몸을 핑계로 반 대항 축구 시합에서 빠진 태오는 짧은 낮잠이라도 잘 요량으로 옥상까지 올라왔다. 방학식을 목전에 둔 학교는 전에 없이 소란스러웠다. 들뜬 분위기라 해도 좋다. 멀리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은 태오는 잠깐의 쉴 틈도 안 주고 들린 문고리 소리에 몸을 퍼뜩 일으켰다.
선생님들은 학생의 옥상 출입을 안전 문제 때문에라도 썩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들킨다고 크게 혼나지야 않겠지만 잔소리를 듣는 일 역시 사양이었다. 바로 옆에 보인 물탱크 뒤로 몸을 감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뭐야.’
옥상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유화인 아냐? …괜히 숨었네.’
검은 티셔츠 위로 단추 푼 교복 셔츠만 걸친 화인이 옥상 벽면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무언가를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태오가 숨은 물탱크와는 거리가 있어 아주 또렷하게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가볍게 감겼다가 뜨이는 눈이나 한숨을 내쉬듯 축 늘어지는 어깨 움직임을 통해 화인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본래 조용하고 얌전하던 그는 제스쳐가 썩 크지 않았기에 더욱 특이했다.
“…안의 주인…이 ……의 문을 소환합니다.”
가장 놀라운 일은 화인이 벽면에 손을 댔을 때 벌어졌다.
‘저게 뭐야.’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연기가 뭉게뭉게 번져나간다. 태오는 흐릿하게나마 옥상 벽면에 짐승의 형상이 새겨진 문이 나타난 걸 목격했다. 문은 시커먼 내부를 온전히 드러내며 서서히 열리고 화인은 그 문을 등진 채 바닥을 보고 있었다. 달싹이는 입술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렸다.
“이 너머가 은세입니다.”
분명 거리가 멀어 또렷이 듣기 어렵던 목소리가 점차 선명해진다.
“현세에 미련이 많으신 건 알겠지만, 이대로는 머지않아 소멸하실 거예요.”
태오는 그제야 화인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아르바이트생이라면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곧 알아서 돌아오겠죠.”
‘아르바이트를 할 거면 정신 똑바로 차려. 만만한 일은 아니니까.’
오버랩 되는 말에 태오는 혼란스러워졌다. 또 기억에 없는 순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근데 만약에라도 옥상 문이 잠겨있으면 어떻게 해? 경비 아저씨가 가끔 순찰을 돌다 잠그시는 경우도 있던데.’
‘상관없잖아.’
“그럼 조심히 가세요. 모노노케안의 주인으로서,”
‘모노노케안을 통하면 되니까.’
“은세까지 당신을 배웅해 드릴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활짝 열린 문 틈새로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이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조그맣고 흐린 형체가 문 너머로 향하고 있었다. 화인의 무릎까지도 오지 않는 크기에 태오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보고 있던 화인의 행동을 떠올렸다. 저게 무언지는 알 수 없지만.
“…….”
저건 아마 처음부터 이 공간에 존재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저 보이지 않았을 뿐.
“…그래.”
도로 닫히는 문 앞에 선 화인이 짧게 물탱크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알아서 돌아와야지.”
분명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태오는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태오에게는 그날부터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하나는 거동이 수상한 동급생에게 자꾸만 시선이 간다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분명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거뭇하고 이상한 덩어리들이 희끄무레하게나마 육안으로 확인된다는 점이었다. 그 덩어리들은 주로 화인의 주변을 면밀히 살필 때 나타나고는 했기에 태오의 시선 역시 그에게 오래 고정되었다. 화인은 그런 시선을 눈치채고 있음에도 가끔 무언가를 시험하듯 태오의 눈을 빤히 마주보기만 할 뿐, 이전처럼 직접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그 행동은 방학식 당일까지 이어졌다. 아침 조례 전에 등교해 태오를 물끄러미 보던 화인은 무슨 할 말 있느냐는 그의 상냥한 질문을 모두 씹어버리곤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자리를 비웠다. 이거 완전 제멋대로 아냐? 교장 선생님의 지루한 연설을 듣는 동안 태오는 화인과 제게 생긴 이상 현상과 알 수 없는 기억을 엮어보았다. 그럴싸한 가설이 몇 개 세워지긴 했으나 확신을 줄 상대가 내내 입을 다문 상태니 무엇 하나 단언할 수는 없었다. 그저 떠올려야 한다는 마음과 주기적으로 한 번씩 안개처럼 몰려오는 망각이 서로 충돌할 뿐이다.
화인을 다시 마주한 건 하굣길에서였다.
길게 난 강변을 따라 걷던 태오는 문득 선뜩함을 느끼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야.” 주변을 둘러보자, 저 앞에 누군가 달음박질치며 달리는 게 보였다. “…유화인?” 화인이었다. 대체 어디서 난 건지 모를 품이 큰 겉옷을 걸친 동급생이 강의 상류를 향해 쭉 달리고 있었다. 물결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마냥 끝없는 뜀박질을 목격한 태오는 이상하게도 그를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적인 감각에 사로잡혔다.
“기다려봐, 화인!”
“…!”
바람이 불고 풀숲이 스산하게 흔들린다. 분명 잔잔한 강에서 약한 파도가 일었다. 물소리가 계속해서 귓전을 차갑게 때렸다.
‘위험하니 너무 가까이에는…’
목소리가 흘러간다.
‘호리병 가득 담기만 하면 돼?’
한없이 좁은 동굴. 오랜 세월 물에 닿아 이끼가 끼고 젖은 바위는 까딱 미끄러지기 쉬워 보였다. 신발과 양말까지 벗어 던진 자신은 샘의 물을 담는데 온 신경을 쏟았다. 바로 옆에는 신경이 쓰이던 예의 동급생이 소맷단 아래에 손을 감춘 채 팔짱을 낀 자세로 서 있었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지?
“반장? 왜 이런 곳에…”
목이 긴 여인은 조바심이 난 건지 위험하다는 만류에도 바위 위로 오르려 들었다. ‘현세에 대한 걸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든 그를 다시 데려오고 싶어.’ 태오의 바로 옆에 쪼그리고 앉은 여인이 불투명하고 끈적하게 고인 샘을 내려다보았다. 나무로 된 신발을 신은 그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너무 가까이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화인이 다시금 여인을 만류했다. 여인은 순순히 수긍하며 몸을 일으켰다. 사고가 벌어지는 건 언제나 이런 순간이었다.
“유화인, 뒤에!”
조각난 거울 위로 펼쳐진 꿈의 형상처럼 기억에서 사라졌던 과거가 파편처럼 스치다 마침내 깨져버린다. 그 너머로 보이는 건 바스락거리는 풀숲 사이에서 튀어나온 시커먼 형상.
미처 방비하기도 전에 화인을 덮친 형상은 그의 몸을 강물로 거세게 밀쳐냈다. 풍덩. 빠져드는 소리가 총성처럼 울린 순간 태오는 내내 막혀있던 회로를 누군가 뚫어버린 듯 띄엄띄엄 떠올리던 기억을 단숨에 떠올렸다. 그 기억 사이에는 화인을 공격한 형상의 정체도 존재했다. 인지하고 깨달으면 이제 선명한 형체를 띤 존재가 눈앞에 또렷이 드러났다. 시커멓고 미끈미끈한 뱀의 형상을 한 요괴는 물에 빠진 화인의 몸을 조르려 들었다.
“잠깐,”
― 간만에 인간의 살점을 뜯어 맛보겠구나. 날 끈질기게 쫓아다니더니, 꼴좋다.
“기다려….”
― 게헤헥. 보이는 인간이 둘이니 둘 다 진미로다. 너는 두 번째다. 우선은 이쪽을…
“기다리라고 했잖아!”
피부로 느껴지는 악의를 예민하게 감지한 태오의 눈이 일순 금색으로 번뜩였다.
― 8일 전
『 태오?! 무슨 일이에요?! 』
호들갑스러운 모노노케안의 족자를 확인한 화인은 한쪽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아르바이트생을 바닥에 눕혔다. “은세에 갔다가 망각의 샘에 빠졌어.” 덤덤한 목소리에 모노노케안은 비명으로 가득 찬 족자를 다시 펼쳤다. “호들갑 떨 거 없어. 숨은 제대로 쉬고 있으니까. 데려다줘야 할 거 같으니 이 녀석 집으로 연결해 줘.” 태오와 마찬가지로 몸의 절반이 흠뻑 젖은 화인은 옷자락을 꾹 눌러 쥐어짰다. 모노노케안은 그 행동에 바닥이 물에 젖어 곰팡이가 슬 게 분명하다며 다시 비명 가득한 족자를 떨어트렸다.
『 목숨에야 지장 없겠지만 정말 괜찮아요? 』
『 망각의 샘은 은세의 존재에게서는 현세를, 현세의 존재에게서는… 』
“은세를 잊게 하지. 몰라. 눈을 떠봐야 알 거 같은데.”
새 옷으로 갈아입은 화인은 얕은 숨을 반복하며 기절해 있는 삼 개월 차 아르바이트생을 못마땅한 눈으로 보았다. “멍청이.” 샘에 빠질 뻔한 요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가 졸지에 본인이 떨어진 다정한 아르바이트생은 가끔 이렇게 화인의 걱정을 살 때가 있었다. 짧은 생을 사는 인간 주제에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저보다 족히 수백 년은 더 살아왔을 요괴를 신경 쓰고, 염려한다.
다정함은 독이 된다. 현세의 인간과 은세의 요괴를 두루 아끼려는 마음은 더욱 그렇다. 오래전 인간으로서 살아가기보단 요괴와의 삶을 택한 화인에게 있어 태오의 존재는 사뭇 이질적이었다. 화인은 가끔 그가 제게 주어진 징검다리처럼 여겨졌다.
현세를 저버리고 은세로 완전히 돌아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과 이 땅을 이어주는 최후의 보루.
“…이렇게 제멋대로 굴어놓고 잊기만 해봐.”
필요 없다는 말을 모조리 흘려 넘기고는 아르바이트생을 자처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태오는 화인의 인생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래서인지 화인에게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독하기로 소문이 난 은세의 망각의 샘에 빠진 걸 보고도 그가 아무런 문제 없이 눈을 뜰 거라 생각했다. 여느 때처럼 머쓱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뒷목을 문지를지도 모른다. 혹시 화가 많이 났느냐며 슬금슬금 눈치를 볼 걸 생각하면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가도 결국 한숨 한 번으로 날리게 되었다.
대신 주먹으로 딱밤이나 크게 놔야지.
마음고생시킨 만큼 네 빚에 추가할 거야.
꼴 좋다. 탕감하려면 의뢰 수 건은 더 해야 할 걸?
『 이렇게 되면 예의 물뱀 요괴 건은 혼자 확인해 봐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
“위험한 요괴도 있다는 건 모르는 게 나으니 상관없어. 그도 잘 설득하면 은세로 돌아가 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 왜 모르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
“…이성적이지만, 생각과 달리 마음을 잘 쓰길래.”
『 화인은 정말 그에 대한 건 오래 보고 있네요. 』
“시답잖은 소리 그만하고….”
곧 태오가 사는 아파트의 방 창문과 모노노케안의 문이 연결되었다는 알림에 화인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인간과 요괴를 공정하게 신경 쓴다. 어느 쪽에도 진심을 보이는 현세와 은세 사이의 끈. 연결고리. 그게 화인이 보는 태오였기에 지금의 광경은 더욱 현실감이 없었다.
간신히 강에서 빠져나온 화인은 손에 금빛 광채를 두르곤 바들바들 떠는 요괴 앞에 선 태오를 올려다보았다. “야.” 부름에도 등을 보인 그는 화인을 돌아보지 않았다. 강렬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미동조차 없음에도 이 『힘』을 앞둔 요괴들은 자연스럽게 몸을 떨며 무릎을 꿇기 마련이다. 그건 죽음을 앞둔 존재가 치는 몸부림에 가깝기도 했다. 화인 역시 이 힘이 있어 모노노케안의 주인이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이건.
“…위광.”
위광이다.
영혼이 거꾸로 뒤집어진 건지 도통 어울리지 않는 냉정한 얼굴을 한 태오가 천천히 요괴를 향해 다가갔다. 소름 끼치는 살의에 화인은 앞뒤 가리지 않고 그와 요괴 사이를 가로막았다.
위광이 둘러진 손에 닿으면 요괴는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현세에서 벌어진 일이어도 은세의 삼권신 귀에 인간이 요괴를 죽였다는 소식이 들어가면 태오에 대한 처분이 어떻게 이뤄질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 이런 건 그저 형식적인 사유일 뿐이야. 다른 무엇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건.
“관두라고 했어.”
네게 살생 같은 걸 시킬 마음이 없어.
“비켜. 잠깐이면 끝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눈을 짧게 깜빡인 순간 태오는 화인을 스쳐 그 뒤에 움츠린 요괴에게로 손을 뻗었다. 흙먼지가 부옇게 일었다. 그 손을 간신히 부여잡은 화인은 이채 하나 없이 형형하게 빛날 뿐인 금색 눈을 마주 보았다. “태오, 아니지,” 손아귀에 있는 힘껏 가해지는 힘에선 화인조차 목적에 방해가 되면 무너트리겠다는 공격성이 느껴졌다. 이런 건 그가 아는 선우태오가 아니었다.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이 사람은.
“당신 누구야.”
금빛은 한없이 눈부시게 일렁였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끝도 없이 퍼져나간다. 마치 빛으로 된 작은 소용돌이가 발생한 것처럼. 일대 전체를 뒤엎을 듯 두 사람의 위광이 맞닿고, 화인은 그 틈새로 상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는 걸 보았다. 그는 이야기했다. 곧.
“알게 될 거야.”
눈을 떴을 때는 모노노케안 내부였다.
“어?”
벌떡 몸을 일으킨 태오는 핑, 하며 짧게 도는 현기증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갑자기 움직이지 마. 너 저혈압이잖아.”
바로 옆에는 평소보다 더 말끔해 보이는 모노노케안의 주인이자 동급생이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화인? 어라, 나, 왜 여기 있는 거지?”
“강가에서 대뜸 기절해 놓고 왜 여기 있는 거냐 물으면 나보고 어쩌란 거야.”
“기절했다고…? 이상하네. 나, 널 보고 쫓아간 건 기억나는데.”
설핏 찌푸려진 미간을 빤히 보던 화인이 손을 뻗어 태오의 이마를 짚었다. 밤공기보다 차갑고 서늘한 손이 천천히 내려와선 그의 눈두덩을 약하게 덮었다. “화인―?” 익숙한 듯 그 손길에 몸을 맡긴 태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화인은 태오의 어깨 힘이 살짝 풀려진 틈을 타 손에 힘을 주어 그를 도로 눕혔다.
“조금 더 자. 방까지 데려다줄 테니.”
“으응. …….”
“할 말이라도?”
어색한 침묵에 화인이 손을 살짝 떨어트렸다. 보이는 건 이제 황금 같은 노란색보단 저무는 해가 낸 일몰의 순간을 고스란히 담아둔 듯한 주홍색의 눈동자. 안에 서린 빛은 화인이 줄곧 지켜봐 온 바로 그것이었다. 돌아왔어. 내심 안도한 그의 심정을 단숨에 눈치챈 태오가 손을 뻗었다.
“왜 그래?”
그러고는 질문한다.
“내가 뭘.”
“심각한 얼굴 하고 있던 거 같아서.”
뻗어진 손가락 끝이 태오의 미간 사이를 가리켰다.
“넌 늘 무슨 문제 있으면 거기에 힘이 들어가잖아.”
다 안다는 듯한 의기양양한 얼굴에 화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화인의 손을 떨쳐내고 마침내 요괴에 닿은 위광은 제 효력을 발휘했다. 현세의 인간을 공격하고 뒤흔들던 식인 요괴는 한 줌 부스러기가 되어 사라졌다. 직후 기절한 태오를 보며 화인은 쭉, 그가 눈을 뜨는 이 순간까지 고민했다. 언젠가는 모든 사실이 밝혀질 거다. 그날이 왔을 때 너는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느냐며 내게 화를 낼지도 몰라.
“그랬던가. 하지만 이번엔 틀렸어.”
하지만 미래가 얼추 예견됨에도 화인은 진실을 감추기를 택했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이 불합리한 마음의 기저가 무언지 도통 알 수 없음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