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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이상 사는 엘프 '율리야'

그녀가 새롭게 조우한 마족 '이바노프'와 함께 변하지 않는 달을 바라보는 이야기.

 

그 궤도에는 다양한 만남과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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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방영 | 28화

장송의 프리렌

葬送のフリーレン

장생종이 이 땅에서 다른 종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여행자가 아니라도 그렇다. 그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그렇게 바삐 사라지는 것인지, 200년을 마을 하나에서 지내본 적도 있으나 드물게 본 것은 오직 자신의 종족뿐이었다. 

율리야는 늘 그렇듯 다른 종족 사이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겨울이면 홍차에 꽁꽁 언 잼과 도수 높은 술을 함께 내오는 이 찻집은 벌써 몇 대 째를 이어온다고 했다. 그 말의 증인이기도 한 엘프는 사람의 손을 타며 처음과는 제법 달라진 잼과 차의 향을 모르는 척해주며 입가로 잔을 몇 번 가지고 갔다. 오히려 바뀌지 않는 건 잔들 들었을 때의 온도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 쓸데없는 감상 같기도 해 혼자 머릿속이 민망하다. 

한동안 그렇게 보냈을 턱인 여유로운 오후가 깨지는 것은 순간이며, 실로 오랜만이었다. 문득 지나가는 인파 사이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낀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섞여 사람 흉내를 하며 지나간다. 갈색에 가까운 주황머리에 회색 눈. 인파에 섞이면 특정하기 어려운 특징들임에도 혼자 또렷이 여겨진다. 아직 티타임 중인데 아쉽다는 감상이 게으르게 스친다. 나갈 채비를 하면 또 방문해 달라는 접객의 말이 이어진다. 

“물론이에요.”

일방적으로 다음을 기약하는 것은 쉽다. 상대가 지키지 않는 것은 너그럽게 봐주는 것 역시. 

상대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지도가 없어도 훤한 곳이니 추적은 어렵지 않다. 앞서가는 머리카락이 한쪽이 더 삐져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더 힘든 편이라 할 것이다. 한참 상대를 주목하고 쫓아가고 있으면 그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다르다는 걸 자연스럽게 안다. 땅에 붙은 것들을 보기 보다 한 뼘은 시야가 올라가 있다. 하늘에 있는 것을 찾는 탐색가처럼 보인다. 멀리 첨탑까지 보이면 언젠가 들은 마족의 악명이 떠오른다.  ‘부유하는 것을 쏘아 떨어트리는 마법’의 소유자라고 했던가. 마법사와 모험가 일행이 빠른 하늘길을 선택했다 몇이나 죽었다는 이야기나, 마을을 지키던 선한 용도 그 마법에 하늘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는 소문은 아직도 들려오고 있다. 그 원인이 아직 살아있기에.

“에라 유성군을 보러 온 것이라면 한발 늦었어요.”

“... …”

말을 붙여도 이쪽을 바라볼 기색은 없다. 그렇더라도 방법이 없지 않다. 떨어트릴 대상이 되어주는 수밖에. 허공을 밟고 올라선다. 한 번에 높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 계단씩 오르는 것처럼 조금씩. 무대로 올라가는 배우의 심정이 이런가 싶다. 예상대로 마족은 공중에 올라선 이를 발견한 듯 시선을 맞춰온다. 어떤 온도 없이 그저 무정하다.

“이제야 이쪽을 보시네요.”

“혼자입니까?”

“그래요.”

마왕의 군세를 대적한 경험이 있다면 마족을 대하는 것은 발에 치일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뻔한 말 하나로도 상대를 흔드는가 하면 문답무용으로 잔혹하게 구는 가지각색의 짐승을 다루는 것에 통용되는 방법은 단 하나. 율리야는 인간에게 없는, 공식 없는 주문을 외웠고 마력 덩어리는 마족 옆의 공간을 크게 관통한다.  

율리야는 바로 다음 주문을 외울 요량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보이는 건 순간이었다. 그는 이 달이 뭘 말하지는 지 알고 있다. 짐승이 아닌 자에게는 충분히 의미 있는 달, 그것이 무대라면 벼렸던 살의라도 놓치는 수밖에 없다.

 

그는 그대로 밤하늘을 춤추듯 부유해 간격을 재기도 전에 이바노프 앞에 도착한다. 한순간임에도 그 마족은 동요하는 법 없이 시선을 다시 달로 한다. 

“알고 있나요?”

여자는 남자가 바라보는 것을 함께 본다. 이 대지로 쏟아질 것 같은 달. 

“무얼 말입니까?”

“관측되지 않아도 계속 거기 있다는걸요.”

꼭 스스로를 칭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달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목적을 알 수 없으니 그리워하라는 말인지 두려워하라는 말인지 방향조차 알 수 없다. 다만 율리야는 그를 끌어당겨 옆에 둘뿐이다. 발은 어느새 첨탑 끝에 붙고 두 어깨는 서로 닿는다. 한순간이 영원인 것처럼. 

 에라 유성군. 50년 주기로 하늘을 가릴 듯 쉼 없이 떨어지는 별들을 사람들은 오래도록 기다린다. 인간의 삶 중 끽해야 두 번 스칠까. 희박한 확률로 마주치는 사건은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 속에서 미화되는 탓에, 드문 것들만이 가지게 되는 낭만이 있다. 유성군을 맞이하여 인간의 마을에는 축제가 한창이다. 아름다운 풍경을 소중한 이와 공유하고 싶다는 바람은 흔하고, 기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음식과 음악을 더한 것이 일종의 축제가 되었다고 했다.

 마을에서 떨어진 자리에는 넓은 숲이 있고, 깎아지른 절벽 위로 높은 탑이 있다.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접근하지 않는 지역이다. 버려진 땅, 불길한 자리. 마족과의 전쟁이 지나가 일부는 옛날이야기로만 남아버린 지금에 와서 그 땅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지만, 먼지 쓴 악명을 두려워하지 않더라도 굳이 찾아가기에는 지나친 험지다. 길 잃은 모험가 따위나 실수로 발을 들였다가 도저히 오를 방법을 찾지 못해 떠나고 마는 정도일까.

 그 계단도 문도 통로도 없는 첨탑의 꼭대기에 한 남자가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설렘을 가지고 올려다볼 하늘을 응시하는 남자의 표정은 열렬한 동시에 차갑다.

 

 낡은 이야기 속의 마족. 수없는 사람을 재미 삼아 학살하다 방랑하던 모험가와의 전투로 큰 상처를 입어 죽음을 맞이한 이. 동화에는 늘 그렇듯 오해와 각색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마족은 죽지 않았고 대신 저주처럼 마음을 빼앗겨 더 이상 사람을 죽일 의지를 가지지 못했을 뿐. 유성군보다 드물게 찾아오는 만월이 있다. 달이 이 땅의 생에 이끌려 하얀 고개를 숙이면, 그것이 유달리 크고 두렵게 보이는 날이.

 

 이 땅에서 문화를 일군 여러 종족이 그 달 아래에서 피를 내기를 저어한 탓에 그날은 무혈의 밤이 되었다. 누구든 싸움을 멈추고 하늘을 보며 기다리다가, 드물게는 고작 하룻밤 새 친구가 되어 전투를 그만두기도 했다. 그토록 낭만이 있는 날이지만…… 유성군과 마찬가지로 자주 오지 않는 탓에 이 땅에는 여전히 미움과 싸움이 멈추지 않는 거겠지.

 

 마족, 이바노프 역시 그런 밤을 겪었다. 싸움을 그만두고 그저 어깨를 맞댄 채 하늘을 올려다본 밤을.

 

 그날 찾아온 모험가는 달 아래에서 하얗게 빛났다. 통로가 없는 탑을 오르기 위해 허공을 밟아 떠오른 여자는 높은 고도에 걸맞는 바람으로 머리칼이 휘날렸고, 인간을 괴롭히는 마족을 처단할 결심으로 곧은 눈빛을 했다. ‘부유하는 것을 쏘아 떨어트리는 마법’만을 평생 연마해온 이바노프가 그를 떨어트리지 못한 것은…… 달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한 번의 합을 겨루지도 않은 채 마법사가 떠나고, 이바노프는 그 뒤로 달에 매혹되었다. 하늘을 부유하는 저 달을 쏘아 떨어트릴 수만 있다면.

 

 그 달을 가질 수 있다면.

 

 에라 유성군이 지나고 한 달이면 다시 달이 가까워진다. 지고 차오르기를 반복하며 점차 크기를 키우는 달은 백 년 전의 기억과 닮아가고 있다. 그럴수록 이바노프는 초조해졌다. 가까워지면 마법을 쏜다. 그리고 떨어트린다. 장생종의 기준에서 오십 년이고 백 년이고 그저 시간의 흐름일 뿐인데 왜 이리 몸을 가만둘 수가 없는지 모를 일이다. 첨탑의 돌난간을 두드리는 손이 멈출 생각을 않았다. 달이 가장 가까워지는 날 최선을 다한 마법으로 결과를 시험하면 그만일 텐데. 연원 모를 불안과 초조는 그림자처럼 이바노프의 발끝을 잡아끌다 기어이 답을 냈다.

 

 “아직 여기 있었네요.”

 

 “…….”

 

 “고작 백 년인데 바뀐 것도 많고요.”

 

 “고작 백 년입니다. 왜 돌아온 겁니까? 여행을 즐기지 않고.”

 

 “글쎄요. 그 날의 달을 잊지 못해서, 라고 해둘까요.”

 

 질척대는 감정의 근원. 그날의 풍경을 이루는 요소의 집합. 밤과 별, 달, 예고 없이 찾아온 불청객. 그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겁도 없이 이바노프의 앞에서 허공을 밟아 유영하는 장생종을. 마족은 고개를 틀어 바닥을 턱짓했다. 첨탑의 꼭대기는 넓지 않아 두 사람은 자연히 거리를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잊지 못한 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손은 이전처럼 떨리지 않는다.

 

 “그날부터 달이 가까워지는 때만을 기다렸습니다. 이번에야 말로 쏘아 떨어트리기 위해서.”

 

 “이번엔 할 수 있겠어요?”

 

 이바노프가 미간을 좁혔다. 자존심과 목적을 저울질하던 그는 오래지않아 천칭의 한쪽을 눌러 내렸다.

 

 “싸우러 온 게 아니라면 돕는 게 어떻습니까. 방해할 셈이라면 돌아가줬으면 하는데요.”

 

 “그냥 바라보는 건 싫어요?”

 

 그저 구경거리로 두라고. 유성군이 떨어지길 기다리던 인간들처럼. 술과 음식, 음악을 곁들일 수도 없는 곳에서 여자는 태연하게 권했다. 이미 우리는 그렇게 한 적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고작 백 년. 짧은 틈을 두고 재회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바노프는 과거가 아득하다고 느낀다. 바람 앞 촛불이라도 된 것 같다. 한때의 강렬함에 치미는 충동을 참지 못한다는 이유로.

 

 달 아래의 여자. 맞닿은 어깨. 서로의 마력 사정권 안에 들어왔음에도 개의치 않는다.

 

 하얗고 창백한 달빛.

 

 하얀 피부를 가진 방문객.

 

 “……그렇게 하죠. 오늘 밤만은.”

 

 푸른색 눈을 바라보다가, 이바노프는 그만, 달을…… 떨어트려 가지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여기고 말았다. 백 년을 괴롭혔던 허기와 충동이 가시는 만족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바노프는 소유욕과 폭력성을 아우르는 이 감정의 다른 이름을 모른다. 다만 오늘 밤을 허락하기로 한다.

컨텐츠 정보

​출연
제작
치즈, 고수
율리야 파기모브나 오르바카이테
Julia Pagimovna Orbakaite
이바노프 일리예비치 시오나
Ivanov Illievich Si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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